(32)울산읍성(蔚山邑城)제4편
-울산읍성의 열쇠, 강해루(江海樓)

▲ 경주도회 좌통지도, 울산부지도(18세기 말 제작)에 묘사된 강해루(江海樓).

울산도호부 읍치의 이문 강해루
울산읍성 소실 130년후 남문 자리에
고을 안팎 경계인 이문 용도로 건설
사신 맞이하고 배웅하는 의례의 장소

‘태화루 남쪽 100보 거리’<학성지>
태화루는 울산객사 앞 남종루 뜻하며
강해루 위치 옛 상업은행 일원 추정
울산읍성의 성벽 위치도 예상 가능

1477년 10월에 조성된 울산읍성(현재 중구 중앙·복산동 일원)의 위곽(성벽)이 어느 곳을 감싸고 있었는가를 살펴보기 위해서는 성문(城門)의 위치가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왜냐하면 성벽은 성문의 양쪽 옆 또는 뒤쪽으로 물러나서 이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1597년 소실될 때까지인 조선초기 울산읍성의 성벽 위치에 관한 기록은 현재까지 밝혀진 바가 없다. 성문에 관한 기록도 매우 적어서 당시의 고문헌 기록만으로 울산읍성의 모습을 유추하기에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정유재란으로 울산읍성이 소실된 직후부터 조선 중· 후기에 이르는 기간 동안의 기록과 자료를 참고해 울산읍성의 모습을 추정하는 것이 하나의 방법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조선초기 울산읍성의 성문(城門)과 관련된 기록은 <성종실록> 275권, 성종24년(1493) 3월13일 기사다. ‘충찬위(忠贊衛) 설진(偰珍)이 상언(上言)하기를, 울산(蔚山) 북문(北門) 밖에 심중청(深重靑)이 생산된다고 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좀더 단적으로 언급한 내용은 <신증동국여지승람> 울산군, 토산(土山)조의 ‘심중청이 군성(郡城) 북문(北門) 밖에서 난다’는 기록이다.

<성종실록>의 내용은 울산읍성이 조성된 지 16년이 지난 뒤의 것으로 조선초기 울산읍성에 북문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가장 이른 시기의 기록이라는데 의미가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은 당시 울산군(蔚山郡)의 성(城), 즉 울산읍성(蔚山邑城)에 북문이 있었음을 명확히 말해준다는 의미가 있다.

하지만, 여기까지이다. 매우 아쉽지만 필자가 줄곧 나름대로 고찰해 보았으나 위의 기록을 제외하고 조선초기 울산읍성의 성문과 관련된 기록은 현재까지 더 이상 찾아 볼 수가 없었으며, 그것이 필자의 능력 부족이자 한계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 향후 많은 학자들의 연구를 기대한다.

▲ 1930년대 항공사진에 추정 표시한 반학헌~학성관, 태화루~강해루의 위치 및 상호거리.

이렇게 소략한 기록만 남겨두고 울산읍성은 1597년 정유재란 때 왜군의 울산왜성 축조로 인해 거의 소실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울산읍성은 꺼질 듯한 역사의 불씨를 부여잡고 그 실마리를 이어왔다.

울산 최초의 읍지(邑誌) <학성지(鶴城誌)>에는 ‘강해루(江海樓)가 태화루(太和樓) 앞의 100보(步) 정도에 있으며, 영조 정미년(丁未年, 1727)에 부사 이만유(李萬維)가 창건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울산부선생안(蔚山府先生案)>에는 ‘울산도호부사 이만유가 1727년 4리문(四里門)을 조성하고 그 중에 남문(南門)은 돌을 쌓고(石築) 문루 3칸을 지었다’는 내용도 있다.

이 둘의 기록은 울산읍성이 소실되고 130년이 지난 뒤 성벽이 없는 상태에서 당시 울산도호부 읍치(邑治, 치소, 울산도호부 중심관아 일곽)의 남이문(南里門, 남쪽 이문)의 용도(기능)로 강해루(江海樓)가 조성되었다는 것을 알려준다.

▲ 현재의 항공사진에 추정 표시한 반학헌~학성관, 태화루~강해루의 위치 및 상호 거리.

이문(里門)이란 성문(城門)이나 주거의 대문과는 다르게 바깥 지역으로부터 마을 또는 관아의 중심지로 들어오는 주요 길의 어귀에 설치하는 것이다. 고대의 여문(閭門)이 이와 비슷한 기능을 했다. 조선시대의 이문은 국가적 방범시책으로서 1465년 도성(都城) 일원에 설치하였고, 이후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그 대표적인 예로, 현재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里門洞)이 지명으로 남아 있다.

이문은 성곽이 설치되지 않았거나, 소실되고 없는 고을에서 그 역할이 더욱 중요했다. 고을 수령이 행차를 나가거나 외부의 사신을 맞이하고 배웅할 때 의례의 장소가 되기도 하고, 고을 읍치의 안팎을 구분하는 경계가 됐다. 특히 울산도호부는 통신사가 지나는 중요한 고을이었기 때문에 이문의 중요도는 더욱 높았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울산도호부 읍치의 남쪽 이문(里門)이었던 강해루는 울산읍성과 어떤 관계가 있는 것일까?

강해루의 위치와 성격은 이만유 자신이 남긴 ‘강해루’라는 시(詩)에 고스란히 묘사돼 있다. 시의 내용 중에 ‘무너진 성벽에 옛 문 자리가 남아 있어(殘墉餘舊址) 아름답게 만드니 곧 새로운 누각이네(華構卽新樓)’라는 대목이 특히 주목된다. 이 내용을 앞의 강해루 관련 두 기록과 종합해 보면, 1597년 울산읍성의 훼손과 더불어 그 남문(南門)이 사라졌음에도 불구하고 1727년 읍성의 남문터(南門址)를 끈질기게 찾아내어 그 자리에 울산도호부 읍치의 남쪽 이문(里門)의 기능을 가지는 강해루를 만들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강해루는 울산읍성의 남문이 아니라, 울산읍성 남문터에 만든 울산도호부 읍치의 남쪽 이문(里門)인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점은 강해루가 울산읍성의 남문터와 위치가 일치한다는 사실이다. 이는 곧 울산읍성 남쪽 성벽의 위치를 찾는데 매우 중요한 실마리를 제공해 준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강해루와 울산읍성의 밀접한 관계성이다.

그렇다면 강해루의 위치관련 내용을 다시 한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앞의 <학성지> 기록에는 강해루가 태화루로부터 앞(남쪽)으로 100보(步) 정도의 거리에 있다고 하였다. 여기서의 태화루는 울산객사 앞에 위치하였던 남종루(南鍾樓)를 일컫는 것으로 현재의 태화강변에 건립된 태화루와는 다른 것이다. 그리고 그 위치는 일제강점기의 사진자료 검토와 최근 발굴조사를 통해 옛 울산초등학교 정문 바로 북쪽(뒤) 운동장 초입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강해루는 구 울산초등학교 정문으로부터 남쪽으로 100보 정도에 위치하였고, 그 장소가 바로 울산읍성의 남문터라는 말이 된다.

강해루가 만들어질 당시의 문헌인 <화성성역의궤(華城城役儀軌)> 도설(圖說)편에는 ‘1보(步)는 주척(周尺)으로 6척(尺)이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태종실록>에서도 ‘주척(周尺) 6척(尺)으로 1보(步)를 삼는다’이 나온다. 그리고 기존의 여러 연구를 통해서 주척 1척이 미터(m)법으로 21㎝ 내외임이 밝혀졌다. 따라서 1보(步)는 126㎝ 내외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 선조들이 5진법 혹은 10진법을 기준으로 ‘정도’라고 표현하였으므로 ‘100보 정도’란 최대 ‘100~110보’를 나타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를 보면, 태화루(옛 울산초등학교 정문)로부터 남쪽으로 100보 정도의 거리는 130~140m 내외로 현재의 ‘문화의 거리’와 ‘7번 국도’가 만나는 교차점 일원(중구 옥교동 255번지 일원, 옛 상업은행 일원)에 해당되고 바로 이곳에 울산읍성 남문(南門)과 강해루(江海樓)가 위치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강해루가 이곳(옛 상업은행 일원)에 위치하고 있었음을 상대적 거리개념으로 표현한 기록도 있다. 1800년대 후반 함안군수 오횡묵의 <총쇄록(叢瑣錄)>에는 그가 울산도호부를 방문해 건물과 건물 사이의 거리를 언급한 내용이 있는데, 반학헌(伴鶴軒, 울산동헌)에서 학성관(鶴城館, 울산객사)에 이르는 거리가 1무(武)이고, 태화루에서 강해루까지 또 1무(武)라고 하여 서로 같은 거리임을 말했다. 여기서의 1무(武)는 1무(畝)와 같은 것으로 100×100보(步)의 정사각형 면적을 가리키는 척도인데, 1무(武, 畝)를 길이의 단위로 사용할 경우는 100보(步)와 같은 것으로 여겼기 때문에 <학성지>의 ‘100보 정도’와 <총쇄록>의 ‘1무(武)’의 기록은 그 의미하는 바가 같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최근 울산객사 발굴조사 내용을 토대로 실제 측정해 보면, 반학헌(울산동헌)과 학성관(울산객사)은 서로 140m 정도 떨어져 있다. 따라서 태화루(울산객사 남종루)와 강해루(울산도호부 읍치 남쪽 이문, 옛 울산읍성 남문터)도 140m 정도 떨어져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는 앞서 1보(주척 6척) 계산법에 의해 추청한 태화루~강해루의 거리 및 위치와 일치한다.

이상과 같이 조선 중·후기를 통해 남겨진 강해루(江海樓)의 몇몇 기록을 서로 비교하고 종합하여 그 위치를 찾고, 그 것이 곧 조선초기 울산읍성의 남문터(南門址)임을 파악하였다.

비록 성문 하나를 겨우 찾은 것에 불과 할 지 모르지만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성벽이 성문의 옆이나 뒤쪽으로 뻗어 나간다는 점을 감안하면, 강해루는 울산읍성의 위곽을 찾아가는 중요한 열쇠(Key)라고 할 수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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