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1)최형우의 의정활동

▲ 8대 총선에서 당선된 뒤 상공위에 배정되었던 최형우 의원(가운데)이 상임위에서 질의를 벌이고 있다. 왼편으로 나중에 국회의장이 된 마산 출신의 황낙주 의원이 보인다.

국회의원 당선 이후 우석과 첫 만남
우석 “야당 때문에 국회 오래가겠나”
야당의 내홍, 대통령 장기집권 빌미
이후 기자에 유신 정보 듣고 말했다
유신 선포 일주일뒤 헌병대 끌려가
야당인사들과 몽둥이질·고문 당해

8대총선에서 당선되었던 최형우 의원에게 몇 가지 고민이 있었다. 첫째는 그가 우석 이후락의 도움으로 당선되었다는 풍문이었다. 당시 국회에서 축하 인사를 하는 의원들마다 최 의원에게 은근히 우석 이후락의 도움을 얼마나 받았느냐고 물었다. 이것은 최 의원이 당초 예상을 뒤엎고 당선되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이 때 이미 우석의 영향력이 울산에서 절대적이었다는 것을 말한다.

최 의원은 8대 총선에서 어려움이 많았다. 우선 7대 총선과 달리 선거구가 변형되어 최 의원의 고향 서생면이 양산군에 편입되어 이에 따른 어려움이 컸다. 8대 총선에서 우석은 공화당의 박원주 후보를 많이 도왔다. 최 의원은 “8대 총선동안 우석은 여러 번 울산을 다녀갔는데 우석이 올 때마다 울산 유지들이 줄지어 그를 따라다녀 이들이 지나갈 때마다 내 지지자들을 빼앗아 가는 것 같아 가슴이 덜컹거릴 때가 많았다”고 회상한다.

8대 총선에서 최 의원이 당선될 수 있었던 가장 큰 요인은 박원주 후보 선거운동원들의 자중지란과 또 타협을 모르는 박 후보의 성격 때문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그를 괴롭힌 또 하나는 줄서기였다. 최 의원이 등원했을 때 그가 소속되었던 신민당은 김홍일과 유진산의 당권싸움으로 내분이 격화되었고 이 과정에서 최 의원 보스인 김영삼 의원이 어정쩡한 태도를 보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고 있었다. 이 싸움에서 결국 김 의원이 유진산 쪽으로 가자 최 의원도 이쪽을 택했다.

그러나 이런 야당의 내홍은 박정희 대통령에게 장기집권의 빌미를 주었고 얼마 있지 않아 유신이 선포된다. 최 의원이 국회의원이 된 후 우석을 처음 만난 것은 박 대통령이 유신을 한창 준비하고 있을 때다. 이 무렵 이장우 비서실장이 그에게 전화를 걸었다. 이씨는 이 때 중앙정보부장 비서실장직에 있었는데 최 의원과는 같은 서생 출신으로 친했다.

이씨는 최 의원에게 우석을 만날 것을 권했다. 당시 우석은 중앙의 실세로 초선의원은 물론이고 심지어 장차관도 그를 만나는 것이 쉽지 않았다. 따라서 최 의원으로서는 이씨의 제안을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최 의원은 이에 대해 “이장우씨가 처음 이런 제안을 했을 때 야당 국회의원인 내가 우석을 만날 필요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고향 선배인 우석을 한번 만나보는 것도 괜찮을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한편은 당시 우석의 세도가 워낙 드셀 때였기 때문에 그의 제안을 거절해 긁어 부스럼을 만들 필요는 없을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고 회상한다.

최 의원이 우석을 만났던 장소가 나중에 박 대통령 시해 사건이 일어났던 궁정동 안가였다. 최 의원이 안가에 들어섰을 때 우석은 최 의원에게 대뜸 “최 의원! 야당이 이렇게 시끄러우니 국회가 어디 오래 가겠습니까”라는 말부터 했다. 최 의원은 회고록 <더 넓은 가슴으로 내일>에서 당시 상황을 다음과 같이 밝혀놓고 있다.

“나는 몹시 불쾌했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를 선배가 하고 있는가. 이 선배가 지금 초선인 나를 불러 놓고 공갈 협박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선거가 끝난 지 불과 한 달도 채 안되었는데…그때 나는 유신쿠데타가 준비되고 있는 줄은 짐작도 못하고 있었다. 당시 박 대통령이 유신준비를 하고 있었다는 것은 나중에야 알았다.”

이번 ‘최순실 사건’으로 밝혀졌지만 이 무렵 이미 김기춘 전 대통령 비서실장을 비롯한 청와대 특보와 한태연, 갈봉근 등 헌법학자들이 이 안가에서 박 대통령의 장기집권을 위한 유신헌법을 만들고 있었다.

최 의원은 의정활동을 활발히 벌였다. 그는 상공위에 배정돼 국정질의를 여러 번 했다.

첫 질의는 공해문제였다. 최 의원이 처음 공해문제를 거론한 것은 당시 이미 공업도시 울산에서 공해 폐해가 심각했기 때문이다. 이 때 이미 석유화학단지가 가까웠던 삼산들과 영남화학 인근 과수원에서는 벼와 과일이 시들고 있었지만 이런 현상이 왜 일어나는지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러다보니 최 의원의 공해 질의는 동료 의원들의 공감을 얻지 못했다. 당시만 해도 건설이 지상과제였기 때문에 공해 문제에 대한 사회적 거부감 역시 활발하지 못했다. 최 의원은 이 때 태화강 수질 오염에 대해서도 강도 높은 질의를 했지만 이 역시 마의 동풍이었다.

그러나 최 의원 질의는 적중해 질의 2년 후인 1973년 매암동에서 사과와 배 과수원을 운영했던 윤한조씨가 영남화학을 상대로 공해배출 소송을 해 승소했다. 그는 320여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는데 이것이 우리나라 최초의 공해소송으로 알려지고 있다.

최의원이 당시 금기시되었던 유신헌법의 질의를 한 것은 유신선포 3개월 전인 1972년 7월 임시회 때였다. 최 의원에게 박 정권이 영구집권을 위해 유신을 획책하고 있다는 정보를 준 사람은 전규삼 당시 신아일보 기자였다. 전 기자는 유신에 대한 정보를 주기 전 신민당을 출입해 최 의원과는 이전부터 친한 사이였다.

그런데 어느 날 전씨가 최 의원을 만난 후 박 정권이 유신을 획책하고 있다는 놀라운 사실을 알려주었다. 이 때 전씨가 이 사실을 알 수 있었던 것은 전씨의 이종 사촌형 김홍래씨가 김종필 국무총리 정보담당 비서관으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최 의원은 “섶을 지고 불길 속으로 뛰어 들어가는 위험천만한 이 질의를 당시로서는 야당 의원 아무도 할 수 없어 내가 김종필 총리를 상대로 질의를 벌였다”고 말한다.

“최근 국민들 사이에는 박 대통령이 프랑스 드골 식 헌법으로 또 쿠데타를 일으킬 것이라는 등 절대로 권력을 내놓지 않을 것이라는 얘기가 공공연하게 떠돌고 있습니다. 저로서는 기우에 지나지 않기를 바라지만 이런 여론이 국민들 사이에 조성되고 있다는 사실이 국민들을 불안하게 한다고 생각하니 이 문제에 대해 질의를 할 수 밖에 없습니다. 본 의원은 이미 오래전부터 한 모교수와 갈 모교수 그리고 청와대 특별보좌관이 모처에 모여 드골 식 헌법과 비슷한 영구집권의 개헌 사안을 구상중이라는 얘기도 듣고 있습니다.”

나중에 최 의원은 “당시만 해도 내가 젊고 용기가 있어 이런 위험한 질의를 겁도 할 수 있었지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겁 없는 행동이었다”고 회상했다.

후폭풍은 예상외로 컸다. 이 보다 2년 전에 있었던 7대 대통령 선거에서 신민당의 김대중 대통령 후보는 “이번 선거에서 박정희 후보를 당선시키면 앞으로 우리국민들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뽑는 기회가 영원히 오지 않는다”는 예언자적 발언을 하면서 자신을 지지해 줄 것을 당부했다.

그러나 이 때 국민들은 박 후보를 택했다. 1972년 10월 17일은 이런 김 후보의 예언자적 발언이 불행히도 적중한 날이었다. 박 대통령은 이날 유신을 선포했다. 이와 함께 박 대통령은 유신 선포 다음날 보안사에 지시해 최 의원이 유신선포에 대한 정보를 어디서 어떻게 알아내어 국회에서 질의 했는지 그리고 최 의원에게 이런 정보를 준 인물을 색출해 엄벌에 처하라고 강조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최 의원이 이에 대한 조사를 받기 위해 영등포 제5관구 헌병대로 끌려간 것이 유신선포 일주일 뒤인 10월25일이었다. 이 때 이미 그가 지구당 위원장으로 있었던 신민당 울산시 지구당의 김기홍, 안석호, 최형호, 장창수, 이기택, 조석구씨는 물론이고 심지어는 김형식씨가 도망가자 그의 부인 이순자 여사까지도 울산 옥동에 있던 경비사령부에 연행되어 엄청난 고문을 받고 있었다. 이후에도 계엄군은 이일성, 이영채, 정계석씨 등 유신선포 때 피신했던 울산 야당 인사들을 보안사로 연행해 온갖 고문을 자행해 많은 사람들이 출옥 후 고문 후유증으로 고생하다가 타계했다.

한편 서울에서는 유신이 일어나 동료들이 체포되자 몸을 피해 서울로 왔던 이일성과 이영채 씨를 숨겨주었던 심완구씨와 원영일 여사가 범인 은닉죄로 체포되어 서울 중부 경찰서를 거쳐 부산 보안사까지 연행되어 심문을 받았다. 최 의원은 헌병대에서 그에게 유신 정보를 준 사람이 누구인지 밝힐 것을 강요당하면서 몽둥이질과 물고문 심지어 전기고문까지 당했지만 입을 열지 않아 전규삼은 살아 날 수 있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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