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84)김재호 박사와 주위 사람들

▲ 야학 김재호 박사는 의사이면서도 60~70년대 울산 정치 발전과 문화운동에 헌신했던 인물이다. 지난 3월 울산의 정치인과 문화계 인사들은 모임을 갖고 그의 타계 41주년을 맞아 그가 묻혀 있는 상북면 길천리 후리마을에 그의 추모비를 세우기로 결정했다. 사진은 지금도 옛 모습을 그대로 간직하고 있는 후리마을의 야학 생가.

군사정권 아래 철저히 탄압 받았지만
의사회·로터리 창립 등 여러 업적 세워
동창이자 울산최초 약사였던 오원근씨
정치 논쟁했던 이동철 울산육영회장 등
주위에 정치·수석인 등 여러 인연 모여
야학 서거 41주년…추모 물결 여전
오는 7월 상북 묘역에 추모비 건립키로

울산은 정해영, 김재호, 최영근, 최형우 등 중진 야당 인사들을 많이 배출했다. 이들 중 지금까지도 울산사람들이 가장 사랑하고 존경하는 인물이 야학 김재호 박사다.

야학은 9대 총선에서 낙선하는 바람에 금배지를 달지는 못했지만 박정희 군사정권이 이 나라를 흔들었던 60~70년대 헌신과 희생으로 어려운 울산 야당을 지켜내었다. 그는 정치만 손을 댄 것이 아니다. 의사회와 로터리를 창립해 스스로 초대 회장이 되어 가난한 이웃을 돌보고 불우한 사람들을 도왔다.

그때까지 울산 사람들 누구도 관심이 없었던 서예, 미술, 국악은 물론이고 70~80년대 울산이 전국 최고의 수석과 분재의 도시로 명성을 날릴 수 있었던 것도 야학이 있었기 때문이다.

군사정권 아래서 철저히 탄압을 받았던 야학은 1975년 7월15일 타계했다. 자신의 호처럼 어두운 시절 들판의 외로운 한 마리 학으로 살다가 울산을 떠났다.

야학은 갔지만 그의 전설은 아직 남아 있다. 지난 3월 울산 문화계와 야당 인사들이 그의 추모비를 세우기 위해 모였다.

이날 모인 인사들은 지금까지 그의 업적을 추모하는 추모비를 세우지 못한 것을 미안하게 생각했다. 이들은 야학 서거 41주년을 맞아 올 7월 상북에 있는 그의 묘역에 추모비를 세우기로 했다.

야학의 정치 행보는 그동안 여러 번 보도가 되었다. 그의 인간적 면모를 알기 위해서는 그가 생전에 누구와 교제를 가졌느냐 하는 것도 중요하다. 야학은 취미가 다양해 수석과 분재, 서도 동호인들을 자주 만났고 정치를 하는 동안에는 많은 울산 야당 인사들이 그가 운영하는 대동의원을 문지방이 닳도록 드나들었다.

로터리 창립 때는 울산 유명 인사들과도 자주 만났다.

야학이 가장 자주 만났던 사람이 오원근씨다. 오씨는 야학의 동래고보 동기로 울산 최초로 정식 약사 자격증을 갖고 울산초등학교 앞에서 울산약국을 운영하고 있었다. 약국이 병원과 가깝다보니 약국을 자주 찾았다.

야학이 오씨 약국을 얼마나 자주 방문했나 하는 것은 오씨의 부친 오일영씨의 행동에서 알 수 있다. 오일영씨는 한학을 해 평소 엄하기로 소문이 났는데 아들 오씨와 옥교동에서 함께 살았다. 그런데 야학이 너무 자주 와 아들을 데리고 나가자 약국 운영이 어렵다면서 야학을 나무랐다는데서 알 수 있다.

이런 인연으로 오원근씨는 야학이 로터리를 창립할 때 크게 도왔고 야학이 초대 회장, 그가 부회장을 지냈다.

이동철씨는 우석 이후락씨가 이끌었던 울산육영회 회장으로 있으면서 울산의 교육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정치적으로 야학은 야당이고 이씨는 우석과 가깝다 보니 자연 여당이 되어 둘은 정치현안을 놓고 자주 다투었다.

대동의원에서 시간이 있을 때마다 정치논쟁을 하다보면 둘 중 이씨가 병원 문을 박차고 나갈 때가 많았다. 그러나 다음날이면 이씨는 다시 병원을 찾았다. 이씨는 당시 복산초등학교 뒤에 살았기 때문에 병원이 가깝지는 않았다. 그러나 그는 매일 출근하다시피 병원을 찾았다. 둘은 특히 바둑을 좋아해 바둑을 함께 둘 때가 잦았는데 이때도 자주 다투어 주위 사람들이 말리느라고 혼이 나곤 했다.

이씨는 이런 인연으로 야학이 서거했을 때 야학의 유품 정리를 도맡아 했다. 이씨는 정리한 유품으로 야학 추모전을 열어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야학 가족들에게 도움을 주었다. 실제로 야학은 경제를 몰라 그가 타계했을 때 집안에 돈이라고는 없어 장남의 대학 등록금을 걱정할 정도였다.

이씨는 당시 자비로 야학 추모비까지 세우겠다고 했으나 가족들이 거절해 실천에 옮기지 못했다. 이씨가 당시 살았던 집은 현재 복산동에 있다. 그의 아들 구열씨는 현재 울산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다.

울산고등학교 설립자인 동시에 교장을 지냈던 이기동씨도 야학을 자주 찾았다. 이씨는 당시 병원과 가까운 고려병원 맞은편 골목에서 살았다. 따라서 자주 병원으로 와 야학과 자장면 내기 바둑을 두었다. 실력으로는 야학이 앞서 자장면을 얻어먹는 횟수가 더 많았다.

야당 인사로 병원을 자주 찾았던 인물로는 심완구, 정계석, 이일성이 있고 9대 총선에서 야학과 대결했던 최형우도 국회의원이 되기 전 용돈이 궁할 때면 병원을 찾곤 했다.

유신 때 야학과 함께 ‘민주회복국민회의’ 공동의장으로 활동했던 김인갑 어른도 자주 야학을 찾았다. 특히 김씨는 기관지가 좋지 않아 병원을 자주 방문했는데 둘은 만날 때마다 울산의 어려운 정치 현황에 대한 대화를 나누곤 했다.

언론인들도 자주 찾았다. 한종오 대구 매일 기자와 이용우 부산일보 기자가 울산 야당의 돌아가는 상황을 알기 위해 병원을 자주 드나들었다. 한 기자는 9대 총선에서 야학을 도왔고 이 기자는 나중에 울산의 대표적인 야당 인사가 된다.

당시 공화당 울산지구당 위원장이었던 이만욱씨와 그랜드호텔 경영주였던 최형원씨도 자주 야학을 만났는데 이들 둘은 야학이 로터리를 창립할 때 큰 힘이 되었다.

수석 탐사는 야학이 여가를 즐기기 위해 시작한 취미였다. 주위 사람들을 모아 ‘울산수석회’를 만들어 운영한 것이 1972년부터다.

당시로서는 별 다른 취미생활이 없었기 때문에 울산수석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했다. 회원들은 정기적으로 탐석을 나갔고 때로는 비정기적으로 울산 인근과 멀리 경북 문경과 점촌 등 좋은 돌이 있다고 소문이 난 지역을 찾곤 했다. 그 때만 해도 자가용을 가진 회원들이 거의 없어 탐석을 갈 때면 버스를 대절해 20~30명이 버스를 함께 타고 탐석 여행을 떠났다.

야학은 수석 중에도 특별히 산수경석을 좋아했다. 야학은 울산에 올 때 이미 수석전문가가 되어 있었다. 야학에게 수석의 재미를 가르쳐 준 사람은 부산 출신의 수석 전문가 윤기준씨였다. 윤씨는 야학이 부산에서 병원을 운영하고 있을 때부터 친했다.

회원들이 취미 생활로 시작한 울산수석회는 회원들이 많아지면서 전국적 명성을 갖게 되어 유명 수석인들을 많이 배출했고 이들 중심으로 전시회도 여러 번 가졌다.

수석에 관한 한 그는 자연석 찬미자였다. 타 지역의 경우 ‘절단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절단석은 돌을 채집한 후 아름답게 손질하는 것을 말하는데 특히 부산 수석인들 중 절단석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에 대해 야학은 “돌은 자연 그대로 있을 때 예술적 가치가 있다”면서 “돌을 손질하는 것은 좋은 취미가 아니다”라고 주장했다. 이 논쟁은 전국 수석인들 사이에도 일어나 한때 수석인들 사이에 불꽃 튀는 논쟁을 벌였지만 결국 대부분의 수석인들이 김 박사의 손을 들어주면서 그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수석인이 되었다.

울산출신 수석인으로 유명했던 인물로는 손해익과 김상수 그리고 지천우 화백이 있다. 손씨는 질 좋은 돌이 많아 전국적명성을 가졌고 경상일보 초대 사장을 지냈던 김씨는 집의 담에도 수석을 올려놓을 정도로 수석을 사랑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야학이 타계한지 이미 40여년이 되었지만 오늘도 그를 추모하는 사람들이 많다. 60년대 북정동에서 불우 청소년들을 모아 재건학교를 운영하면서 야학으로부터 학생들의 무료 진료와 치료를 자주 받았던 이민규 전 경남도의회 부의장은 야학을 헌신적인 의술인이었다고 말한다.
 

9대 총선에서 야학의 참모로 활동했던 심완구 전 울산시장은 그에대해 울산야당의 초석을 세운 인물로 울산 정치인들이 영원히 존경해야 할 사람이라고 회상한다.

서진길 전 울산문화원장은 평생 울산의 문화 발전을 위해 일한 야학은 항상 주위의 불우한 사람들을 돌보았던 극히 인간적인 사람이었다고 강조한다.

울산수석회 회원으로 수석 탐사를 함께 했던 지천우씨는 야학이 자연과 울산을 사랑했던 울산문화운동의 선구자라면서 그의 헌신적인 문화 활동을 울산시민 모두가 기억해야 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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