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울산읍성(蔚山邑城)제6편 - 울산읍성의 성벽(체성)은 어디에?

▲ 울산읍성 추정 위곽과 현재까지 확인된 근대기 이전 우물 위치.

평산성의 입지적 특성

능선따라 성벽 쌓아 방어기능 높이고
평지·구릉부는 진입 고려, 성문 조성
뒤로는 함월산 남쪽 지맥에 걸쳐있고
앞으로 태화강 북쪽 퇴적지와 마주해

성벽 위치 추정의 지표

동헌과 인접한 능선따라 구성 가능성
능선 둘레 약 1.7㎞로 옛 기록과 비슷
서문내외·남동문내 등 마을이름들과

성벽 안쪽의 우물위치로도 추정 가능

성(城)에 있어서 성문(城門)은 일정 구역을 둘러 싼 성벽과 내부의 주요 가로(街路)가 서로 만나는 지점에 조성되는데, 이를 다른 관점으로 보면 성벽 즉 체성(體城)은 성문(城門)의 양쪽 옆으로 뻗어나가면서 구성 된다고 말할 수 있다. 따라서 울산읍성의 경우도 성벽(체성)이 4개의 성문 옆으로 뻗어가며 조성되었을 것이며, 성벽이 둘러싼 내부에는 고을을 다스리는 관아(官衙·동헌)가 위치하고 그를 중심으로 주요 가로(街路)가 형성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성벽의 위치를 보다 명확히 찾아보기 위해서는 그 주변 지형을 면밀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우리나라의 성(城)은 언양읍성처럼 ①평지에 조성된 평지성(平地城) 외에 ②경사가 급한 산지(山地)에 위치하는 산성(山城), ③산과 평지를 동시에 끼고 조성된 평산성(平山城)이 있다.

평지성은 오로지 성벽의 높이에 의지하여 방어해야 하는 단점이 있는 반면 마을과 도시가 가까이에 형성되어 사회적 관계가 서로 긴밀하다는 장점이 있다. 이와 반대로 산성은 깊고 높은 산지에 조성되기 때문에 성벽 밖으로 경사가 심하여 적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리하지만, 산 아래의 마을과 도시로부터 성(城)이 멀리 떨어져 있어 사회적 관계가 결여되는 단점이 있다. 그리고 평산성은 이 둘의 장점이 적절히 조화된 특징이 있다. 산과 평지가 이어지는 곳에 성이 걸쳐있어 산과 가까운 부분은 능선을 따라 성벽을 조성하여 방어에 유리하게 하고, 평지나 그에 가까운 부분은 얕은 구릉부를 따라 성벽을 조성하되, 성으로 진입하는 주요 길(路)을 고려하여 성문(城門)을 조성한다. 따라서 인접 마을과의 사회적 관계성도 비교적 높은 편이다.

이처럼 평산성과 산성은 산(山)을 끼고 있다는 지형적 조건에서 평지성과 근본적으로 차이점을 보이며, 이것은 곧 성(城) 내부에 위치한 동헌 등 관아(官衙)의 주변에 쌓을 성벽(체성)의 위치 결정 문제와도 직결된다. 왜냐하면 동헌 주변에 솟은 산(山·높은 구릉 포함)을 성(城)의 범위에 포함하면 적을 감시하기 위한 망대(望臺)의 역할을 하게 되지만, 높고 경사져서 쓸모없는 곳이라 하여 성의 범위에 포함하지 못하고 내버려둘 경우 오히려 적이 성 내부를 염탐(廉探)하거나 공격하기 좋은 장소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능선을 따라 성벽을 쌓으면 그 바깥쪽 골짜기 부분이 급경사를 이루어 적의 입장에서 볼 때, 공격이 매우 어렵게 되기도 한다. 이것은 어쩌면 성곽 조성의 기본이라고도 할 수 있다.

▲ 울산동헌 주변의 지형 상황.

이러한 점에서 앞서 살펴본 울산읍성 4대 성문의 위치를 염두에 두고 그 주변의 지형을 살펴보면, 울산읍성은 평산성의 입지적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뒤쪽으로는 함월산(含月山)의 남쪽 지맥(支脈)에 걸쳐 있고 앞으로는 태화강 북쪽 가장자리의 퇴적지를 마주하고 있다. 그리고 함월산으로부터 남쪽으로 뻗어 내린 지맥은 울산향교 동쪽 부분(현재의 북정교차로, 혁신도시와 원도심의 경계부)에서 두 갈래로 나뉘는데, 하나는 향교 앞에서 높이 솟아 양사초등학교가 위치한 남쪽으로 내려가고, 다른 하나는 울산기상대 옆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가다가 다시 동헌방향과 그 남동쪽으로 서로 갈라진다. 이를 입체 지형도와 현재의 항공사진에 표기해 보면 다음과 같다.

이를 보면 동헌 일곽을 감싼 울산읍성은 앞서 언급한 지맥(支脈·구릉)의 능선을 따라 성벽(체성)을 쌓아야만 적으로부터 노출이 최소화 되었을 것이라는 짐작이 가능하다. 우리나라 읍성의 대부분은 산지와 평지를 동시에 끼고 있는 평산성이 주(主)를 이룬다. 밀양읍성은 들판이 넓어 완전한 평지성을 구성할 수도 있었지만, 인접하여 2개의 산봉우리가 솟아 있기 때문에 이를 비워둘 수 없는 상황에 놓여 있다. 따라서 성벽은 힘겹게 산의 능선을 따라 가면서 두 봉우리를 연결하였다. 그리고 사천읍성, 강진읍성, 선산읍성, 진도읍성 등도 인접하여 하나의 봉우리가 있어 그 아래에 평지에만 성을 쌓을 경우 봉우리로부터 성 내부가 노출되기 때문에 기어이 산을 타고 성벽이 조성되었다. 이는 유사한 지형적 특성을 지닌 울산읍성의 경우도 예외일 수 없는 이유에 해당한다.

이러한 사항 및 앞서 살펴본 4개의 성문 위치를 종합해보면, 울산읍성의 성벽은 다음과 같이 동헌과 인접한 능선을 따라가며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리고 그 둘레를 실측해 보면 약 1.7km인데, 이는 <성종실록>과 <신증동국여지승람>에 기록되어 있는 읍성둘레 3630여 척(尺)과 신기하게도 거의 들어맞는다.

한편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울산읍성 안에 8개의 우물(井)이 있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현재까지의 발굴조사와 지표조사를 통해 확인된 근대 이전 형식의 우물은 6개소이다. 그중 해남사(海南寺) 경내에서 확인된 우물은 그 깊이가 18m 이상으로 관(官) 주도가 아니면 도저히 조성하지 못할 정도의 규모를 자랑한다. 개개의 우물이 성벽의 위치를 직접적으로 알려 줄 수는 없지만, 전체적인 분포상황 상 성벽의 안쪽에 우물이 위치하였을 것이라는 점에서 우물은 성벽위치 고찰에 매우 중요한 지표가 된다고 할 수 있다.

이와 더불어 성문(城門)과 관련된 마을의 이름 또한 성벽의 위치를 찾아보는데, 중요한 정보를 제공해 준다. 울산 최초의 읍지인 <학성지(鶴城誌)>(1749)에는 울산도호부의 각 면(面)에 대해 분류하고 설명한 부분이 있는데, 그 중 울산동헌과 그 주변마을을 포함한 부내면(府內面) 조항에서 서문내외(西門內外)마을, 북문내외(北門內外)마을, 남동문내(南東門內)마을 등을 찾아볼 수 있다. 이 내용은 1749년 당시 서문(西門)과 북문(北門)을 기준으로 안마을과 바깥마을이 각각 위치하였고, 남문~동문에 걸쳐서도 마을이 있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를 근대이전의 모습을 가장 잘 반영하고 있는 1918년의 지형도와 1920~30년대에 촬영된 울산동헌 일곽의 항공사진에 대입해 보면, 성문과 성벽의 위치를 개략적으로 가늠할 수 있다. 특히 북문 안마을과 바깥마을은 북문의 위치를 찾을 때 결경적인 역할을 해주는데, 지도와 항공사진에서 동헌 북쪽(동헌 서쪽 인접의 북쪽)으로 조성된 길에는 마을이 위치하지 않고, 동헌 앞에서 서쪽으로 난 길에 마을이 집중되어 있음을 볼 수 있다. 이는 울산읍성의 북문이 동헌의 북쪽이 아닌 서쪽에 있었고, 북문 주변의 성벽도 그 마을들의 경계부를 따라 형성되어 있었음을 넌지시 알려준다.

그리고 이를 염두에 두고 현장을 답사(지표조사)해 보면, 울산읍성 조성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는 성돌(城石)을 곳곳에서 찾아 볼 수 있는데, 특히 일제강점기까지 거의 건축이 이루어지지 않았던 울산향교 앞 구릉의 능선부 일원(울산 중구 초은길, 원불교 울산교당 일원)에는 직경 1m 이상의 큰 돌들이 곳곳에 흩어져 있고, 이러한 상황은 능선을 따라 북정교차로 방향으로 이어진다. 능선을 따라가며 형성되는 평산성 읍성의 성벽조성 특성이 울산읍성의 현지 지표조사에서도 어렵지 않게 확인되는 것이다.

이처럼 울산읍성은 1597년 정유재란을 기점으로 뜯겨나가고, 때로는 집과 길 아래로 숨어들었지만 그 몇몇은 민낯을 드러내며 머지않아 실시될 매장문화재조사(발굴조사 등)를 기다리고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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