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울산읍성(蔚山邑城)제7편 - 울산도호부의 관아(상)

▲ 울산동헌(반학헌) 추정도.

울산초교 위치에 있던 객사 학성관
객사정문으로 수장고 기능의 제승문 등
학성지 등 기록서 읍성내 관청 소개
1930년대 촬영 사진속 태화루는
옛 울산초교 정문으로 2층 도서관 활용
이후 학성이씨문중 이휴정으로 남아
내동헌은 반학헌·보적헌 등 현판 걸려
1930년대 군청사 회의실로 사용되기도

일반적으로 관아(官衙, 관청)는 읍성 내부의 중요한 곳을 택하여 배치하기 때문에 1477년 10월 울산읍성의 완공은 울산동헌 일곽의 완성을 의미한다고도 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 울산동헌이 위치한 곳을 중심으로 동헌과 객사 및 기타 관원들이 집무를 보는 여러 관청들이 배치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1477년 당시의 관아와 그 배치에 관한 기록은 매우 적기 때문에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알기 어렵다. 다만 임진왜란을 겪고 난 뒤인 1749년에 정리한 울산 최초의 읍지(邑誌) <학성지>(鶴城誌)와 이후의 <영남읍지울산부사례읍지>(嶺南邑誌蔚山府事例邑誌, 1894) 등의 기록을 참조하면 읍성 내부에는 다음과 같은 관청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객사(客舍)인 학성관(鶴城錧)은 1667년 중창되었고, 임금의 전패(殿牌)를 모시는 전청(殿廳, 정청) 3칸(間), 울산을 방문한 관료가 머문 동익헌(동쪽 날개채)과 서익헌이 각각 5칸이며, 그 정문인 제승문(制勝門)은 3칸으로 문 안에 동행랑 6칸, 서행랑 6칸 및 별채의 공수(公須) 8칸, 문밖에 동익랑 3칸, 서익랑 3칸 등이 있었다. 객사는 고을의 수령이 매월 음력 초하루와 보름 및 특별 기념일에 임금의 전패를 향해 망궐례(望闕禮)를 올리며 일종의 선정(善政, 왕의 뜻을 받들어 올바른 정치 수행)을 다짐하던 곳이다. 그리고 학성관의 동·서익헌은 1831년 부사 민치문이 중건하여 각각 6칸으로 늘어났는데, 이것은 전청과 익헌 사이의 비워진 칸(間)을 내부공간으로 개조하여 사용하면서 1칸이 늘어난 것으로서 전체적인 규모는 이전의 것이 유지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 1910년대 울산객사 일곽.

한편 울산객사는 1907년부터 창호를 비롯한 내부공간이 개조되어 울산공립보통학교(현재 울산초등학교)로 사용하였으며, 1934년에 헐려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객사 정문인 제승문은 정면 3칸인데, 그 좌우에 각각 1칸의 작은 협문을 덧붙여 두었다. 객사는 신(神)의 범주에 버금가는 임금을 모신(임금의 전패를 모신) 곳이므로 예(禮)를 갖추기 위해 평소에는 객사 전청 앞의 어도(御道, 임금 길)와 연결된 가운데 문은 이용하지 않고 들어갈 때는 동쪽, 나올 때는 서쪽 협문을 이용하는데, 이를 동입서출(東入西出)이라고 한다. 이 때문에 제승문의 좌우에 협문이 부가된 것이다. 이는 동일한 이름을 가진 병영객사의 제승문도 마찬가지였다.

또한 제승문 좌우의 흙벽으로 막혀진 각각 1칸의 공간은 중앙과 다른 고을의 관료들이 말(馬)이나 가마를 타고 방문했을 때, 이를 보관하는 일종의 수장고이다. 이는 조선시대 상류주택 대문채 마구간(馬廄間)의 기능과 같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제승문은 1930년대 울산공립보통학교의 운동장 확장으로 인해 소실되었다.

제승문 밖에는 종루(鍾樓)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객사에 딸린 문루(門樓)로 임진왜란 이후 태화루(太和樓)라고 부르던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몇 장의 사진을 확대하여 분석해 보면 태화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의 9칸 규모인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문헌에는 태화루가 6칸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는 정면 3칸이 2층으로 구성된 것을 표현한 것으로 여타지역의 누각 건물도 이렇게 기록한 사례가 더러 있다.

▲ 일제강점기에 울산군청으로 개조된 동헌(반학헌)과 장주초.

1930년대에 촬영된 동영상과 사진들을 보면 태화루는 울산공립보통학교의 정문으로 이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1923년부터는 누각의 2층에 문을 설치하여 울산도서관으로 사용하였다. 그리고 1940년 5월에는 운동장의 재차 확장으로 철거되었고 학성이씨문중의 개인에게 매각되어 현재 이휴정(二休亭, 울산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호)의 모습으로 전하고 있는데, 사라지지 않고 남아 있는 것만으로도 다행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동헌에 대해서는 내동헌(內東軒)과 외동헌(外東軒)으로 구분하였는데, 내동헌은 3칸으로 1681년 부사 김수오가 조성하였고, 그의 아들인 부사 김호가 1695년 일학헌(一鶴軒)이라고 편액하였다. 일학헌은 1761년(혹은 1760년) 부사 홍익대가 6칸으로 규모를 늘여 반학헌(伴鶴軒)이라고 이름 붙인 것이 지금까지 전해오며, 이것이 현재의 동헌이다. 내동헌에는 반학헌(伴鶴軒)뿐만 아니라 보적헌(保赤軒)·고인루(故人樓)라는 현판도 함께 걸려 있었다. 그리고 반학헌의 동쪽 옆에는 울산도호부사 김헌수(金瀗秀)가 1888년에 만든 청민당(聽民堂)이 있었는데, 이는 소동헌(小東軒)으로도 불렸다.

내동헌인 반학헌은 앞서 언급한 바와 같이 정면 6칸의 건물인데, 2칸 온돌방의 동쪽으로 대청마루가 있고, 다시 그 동쪽 끝에 1칸의 누마루(樓軒, 높게 들려있는 마루)가 있었다. 이를 정면에서 다시 보면, 온돌방 2칸, 대청마루 3칸, 누마루 1칸으로 구성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 고을 수령의 집무처인 동헌은 일반적으로 누마루로 구성된 마루방 1~2칸을 둔다. 온돌방이 겨울 중심의 4계절용 집무실이라면, 누마루방(높게 들려있는 마루에 벽체와 문으로 둘러친 방)은 여름용 집무실이라고 할 수 있다. 이 누마루방은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반학헌 사진의 동쪽 끝 1칸에 장주초(長柱礎, 돌기둥 주춧돌)가 설치되어 있는 것에서도 확인된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울산읍성 동헌에 걸려있던 현판의 위치를 찾아 가보면, 대청 가운데에는 동헌의 가장 큰 이름인 반학헌(伴鶴軒), 온돌방에는 임금을 향한 붉은 마음을 간직하고 집무를 보겠다는 뜻의 보적헌(保赤軒), 누마루방에는 앞서 다녀간 선배 수령들의 훌륭함을 따른다는 뜻의 고인루(故人樓)라는 현판이 걸려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1930년대 중반 반학헌의 바로 앞에 울산군청사가 새로 건축되면서 반학헌은 그 부속건물로 전락하여 회의실로 사용되었고, 평면과 입면구성이 상당부분 변형되었다. 그리고 현재의 울산동헌(반학헌)은 1979년 울주군청의 이전과 여러 사정이 겹쳐 원형을 제대로 고증하지 못한 채 1981년에 시급히 조성된 것인데, 앞의 기록과 다른 지역에 전하고 있는 동헌을 바탕으로 울산동헌을 추정해 보면, 다음과 같은 모습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반학헌의 건축부재 중 장주초(長柱礎, 돌기둥 주춧돌)로 추정되는 1개가 현재 중구의 어느 상가 마당에 위치하고 있음을 보면, 역사는 결코 섣불리 사라지지 않는다는 진리와 마주하게 된다.

내동헌에는 이 밖에 고인루(故人樓)라는 현판이 달린 곳도 있었다. 고인루 아래에는 통인(通引, 관아의 잔신부름을 하던 구실아치)의 입직방(入直房, 숙직방)이 있었던 것으로 전한다. 그리고 그 동쪽으로 염성문(廉省門) 4칸이 있고, 반학헌의 서쪽 모퉁이에 수령 전담 신부름꾼들이 머문 흡창방(吸唱房) 3칸이 있었다. 따라서 반학헌은 일제강점기 이전만 하더라도 현재의 모습과는 달리 누마루가 1칸 딸린 6칸 규모였고, 그 양 옆으로 회랑(回廊)과 유사한 작은 건물들이 길게 연결되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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