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가 서로 포옹하고 있는 모습을 당시 재판을 맡았던 일본 판사가 촬영한 사진. 이 사진으로 인해 사진을 촬영한 판사는 사직했고 와카쓰키 내각은 총사퇴하는 등 일본 정계에 큰 파문이 일었다. SNS캡처.

이준익 감독의 열두 번째 작품인 영화 ‘박열’의 콘셉트 이미지가 공개됐다.

배급사 메가박스(주)플러스엠 측은 23일 공식 SNS를 통해 주인공 박열 역의 이제훈이 콘셉트 컷 촬영 중인 모습을 담은 24초짜리 비주얼텔링 영상을 공개했다.

한편, ‘박열’의 콘셉트 이미지와 비주얼텔링 영상이 공개된 직후 영화 박열의 실제 주인공인 독립운동가 박열에 대한 관심이 커지고 있다.

독립운동가 박열은 경상북도 문경 출신으로 1921년 조선인 무정부주의자 및 사회주의자와 함께 동경 흑도회를 창립했다.

이후 1922년 반전활동가 였던 일본인 가네코 후미코와 만난다. 가네코 후미코는 박열과 함께 비밀결사 ‘불령사(不逞社)’를 결성해 조선의 독립 운동을 후원하고, 일본 천황제 타도를 지향했다.

그러던 중 1923년 9월 1일,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10만여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동의 건물이 무너지는 대 참사를 맞이한 일본은 대지진의 공포를 조선인과 사회주의자에게 돌리려 ‘사회주의자와 조선인이 우물에 독약을 탄다’는 거짓 소문을 퍼트렸다.

그리고는 “불령선인들을 수색하고 선량한 조선인들을 보호한다”는 명분 아래 한인들을 검속했다. 박열과 가네코 후미코 등 불령사의 회원들이 이 때 일제히 체포됐다. 이후 박열은 일경의 신문 과정에서 일왕에 대한 폭탄 암살 계획을 당당하게 밝혔다.

결국 재판에 과정에서 두 사람은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선고 직후 열흘 후인 4월 5일, 대역사건으로는 이례적으로 무기로 감형됐다.

무기징역으로 복역중이던 가네코 후미코는 1926년 옥중에서 교살된 채 발견됐다. 당시 타살 의혹이 강하게 일었으나 형무소 측은 가네코 후미코의 시신 인도 요구를 모두 거절하고 자살이라고 발표했다.

박열은 22년 2개월 복역 끝에 출소해 1946년 2월 백범 김구의 부탁을 아래 윤봉길, 이봉창, 백정기 의사의 유해봉환 추진위원장을 맡아 활동 했다.

후에 박열은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발발한 당시 서울에서 납북되었으며 1974년 1월 북한 당국은 박열의 사망 소식을 전해왔다. 디지털뉴스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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