밭둑에서 나는 바람과 놀고
할머니는 메밀밭에서
메밀을 꺾고 계셨습니다.
늦여름의 하늘빛이 메밀꽃 위에 빛나고
메밀꽃 사이사이로 할머니는 가끔
나와 바람의 장난을 살피시었습니다.
해마다 밭둑에서 자라고
아주 커서도 덜 자란 나는
늘 그러했습니다만
할머니는 저승으로 가버리시고
-중략-
할머니는 나를 두고 메밀밭만 저승까지 가져가시어
날마다 저녁이면 메밀밭을 매시며
메밀꽃 사이사이로 나를 살피시고 계셨습니다.

▲ 엄계옥 시인

그리움은 하늘가에 산다. 기억 저편에서 어느 날 문득 오기도 한다. 돌아갈 수 없는 것은 그리움이 된다. 캄캄한 하늘이 이번엔 메밀밭이 되었다. 지천으로 별꽃이 핀 천정, 손자를 못 잊어 저승까지 메밀밭을 가져가신 할머니. 어린 시절을 가장 푸근하게 하는 건 할머니다. 척박해서 별무리만 살찐 산골, 멍석에 누워 주먹만 한 별을 세며 할머니의 옛날 얘기를 듣는 밤은 꿈결이다. 우리는 두 눈에 별을 담고 있으면서도 먼데 있는 별을 그리워한다. 그리움의 원천이 그곳에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생명에게 어린 혼은 몸 안에 가두고 몸 밖은 덩치만 키워 어른이게 하는 이중성을 갖게 한다. 혼과 육체가 하나이던 시절이 아름답게 느껴지는 이유다. 저녁별 사이로 손자를 살피시는 할머니, 오늘밤은 기어이 도시의 하늘에도 오실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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