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4)권기술

▲ 권기술 의원(오른편)은 정치적으로는 최형우 의원의 문하생이었지만 나중에 전국구 공천 헌금문제로 불협화음을 내면서 둘은 갈라지게 되었다. 1988년 12월 삼남지 발간 축하연에 참석했던 권 의원이 권상술 삼남지 발간 추진위원장과 함께 포즈를 취하고 있다.

최영근 의원네서 가정교사하며 정치인 꿈 꿔
첫출마 43세 첫당선은 58세…15년 원외활동
12대, 신민당 최형우 의원에 정치헌금 전달
전국구 출마 불발되자 형제 동원 낙선운동

15·16대 금배지 달고 지역현안 해결에 앞장
17대 총선 앞두고 강도 드는 등 악재 겹쳐
결국 선거자금 관련 각종 루머로 17대 낙선
2011년 집에서 넘어지면서 목뼈 다쳐 영면

11대국회의원 출마자 중 새로운 얼굴로 권기술 후보를 빼 놓을 수 없다. 권 후보가 정치에 뜻을 둔 시점은 50년대 말이다. 최영근 의원 집에서 가정교사로 일하면서 농민들이 잘사는 사회를 만들어야겠다는 생각으로 정치에 뜻을 두었다.

가정교사로 있을 때 그는 건국대학을 다녔다. 반곡초와 제일중을 졸업했던 그는 고등학교는 대구로 가 대건고를 다녔다. 고교 때는 노래를 잘해 대학 입학 전 대구 MBC 전속가수로 활동을 했다.

정치인으로 꿈은 일찍 꾸었지만 정치에 발을 들여 놓은 것은 늦었다. 처음 출마했을 때가 43살이었고 처음 당선되었을 때가 58살이었다. 15년 동안 원외 인사로 있으면서 고생도 많이 했다. 원외로 있을 때도 태화동에 선거사무실을 두었고 매년 봄·가을에는 삼동의 신격호 별장에서 당원단합대회를 가졌다.

농민운동도 열심히 하면서 농민후계자들을 키웠다. 11대 총선 때는 그의 소유였던 농약비료회사인 대우화학까지 팔아 총력전을 펼쳤으나 낙선했다.

그에게 정치 입문을 권한 사람은 최형우 의원이었다. 그가 최영근 의원 집에 있을 때 최 의원은 식객으로 자주 드나들었다.

이처럼 친했던 둘의 관계가 악화 된 것은 12대 총선 때다. 권 후보에 따르면 12대 총선 무렵 최 의원이 신민당 전국구를 주겠다면서 권 후보로부터 1000여만원의 정치 헌금을 받아갔다. 그런데 선거를 앞두고 권 후보가 신민당 전국구 명단을 보니 자신의 이름이 보이지 않아 이의를 제기해 문제가 되었다.

형제처럼 지냈던 둘 사이가 나빠 진 것은 이때부터다.

원외 정치인으로 오랫동안 힘든 길을 걸었던 권 후보가 처음 금배지를 단 것은 15대 총선 때다. 이 때 ‘꼬마 민주당’후보로 울주군에서 출마해 승리했다. 초선의원이었지만 여당인 국민회의와 제1야당인 신한국당이 서로 영입을 하려고 해 몸값이 높았다.

여야 갈림길에서 그는 결국 야당인 신한국당을 택했다.

16대 총선에서는 한나라당 후보로 울주군에서 출마해 당선, 재선의원이 되었다. 비록 재선의원이었지만 원외 활동을 오랫동안 했던 그는 국회 내 지인들이 많아 국회의원들이 제일 선호하는 건설분과 위원이 되었다.

건설분과위에 있을 때는 도로와 농어촌 기반 사업 등 지역현안을 위해 많은 일을 했고 나중에는 해양수산부로 상임위를 옮겨 울산의 신항만 건설에도 힘을 보탰다.

16대 대선과 중구 보궐 선거는 그가 신한국당 울산시지부장으로 있을 때 치러졌다. 그는 이 선거를 치루는 동안 선거 자금과 관련 각종 루머에 시달려야 했다. 이런 루머는 17대 그의 선거까지 연결되어 결국 17대 총선에서 낙선하고 말았다.

이에 앞서 1995년에는 울산시장 선거가 있었다. 이 때 권 후보 주위 사람들은 권 후보에게 시장 출마를 권유했지만 그는 자신이 의회주의자라면서 이를 단호히 거절했다.

1998년 지자체 도입과 함께 있었던 울주군수 선거에서는 박진구씨에게 한나라당 공천을 주어 당선시켰다. 그러나 박 군수가 자신과 다른 엇박자 군정을 펴자 사이가 벌어졌고 결국 박 군수는 한나라당을 탈당했다.

이후 2002년 지자체선거에서 그는 엄창섭 당시 울산부시장을 울주군 한나라당 후보로 내세우고 지원해 당선시켰다. 그러나 다음 선거에서도 당선되었던 엄 군수는 중도에 뇌물죄로 사퇴하는 바람에 그를 힘들게 했다.

17대 총선을 앞두고는 악재가 겹쳤다. 조상의 산소가 가까운 곳으로 도로를 내다보니 언양의 도시계획이 잘못되었다는 지적을 받기도 하고 집에 강도가 들어와 곤욕을 치루기도 했다. 더욱이 강도가 권 후보의 차를 몰았던 운전사로 판명나면서 그는 도덕적으로 치명상을 입었다.

이 때문에 17대 총선에서는 현역의원이면서도 공천경쟁을 치러야 하는 수모를 겪었다. 17대 총선에서는 가까스로 공천을 받았지만 우리당의 강길부 후보에게 패했다. 이 때문에 그는 강 후보와 사이가 좋지 않아 강 후보가 당선 후 한나라당 입당을 시도했을 때는 앞장 서 반대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2010년 울산광역시 시장 선거를 앞두고는 강 의원과 박맹우 시장이 경선을 벌였는데 이 때는 강 의원 편을 들었다.

2011년 2월 죽음은 어처구니없이 찾아왔다. 평소 심한 당뇨로 매일 저녁 한밤에 일어나 할 일 없이 시간을 보낼 때가 많았다. 사고가 발생한 날도 그는 자정이 넘었는데도 잠이 오지 않아 한밤에 양주 한 잔을 마신 후 잠자리로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 때 넘어지면서 식탁 모서리를 받아 목뼈를 다쳐 병원으로 가 수술을 받았다.

이후 한동안 회복을 보였으나 입원 일주일 뒤 갑자기 상태가 악화돼 영면했다. 최형우 의원과 불운을 풀지 못하고 눈을 감은 그는 오랜 야당생활에도 재산을 많이 남겨 세인들을 다시 한 번 놀라게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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