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96)이후락과 울산대학교

▲ 평소 추사 김정희의 추사체를 좋아해 배웠던 우석은 그가 제작한 도자기에도 추사체로 글을 쓸 때가 잦았다. 사진은 우석이 추사체로 도자기에 쓴 ‘반야심경’이다.

울산 정치사에서 최다 언급 ‘이후락’
지역사회에 큰 영향력 끼쳤다는 증거
별장 육석정·생가 등 흔적은 사라져
우석이 중앙의 권좌에 있을때
지역 젊은이 불러올려 요직 맡겼고
울산대 설립 앞장, 초대이사장 역임
최성만 부산일보 기자, 에세이 통해
“울산대는 학교 설립 30년사에
‘설립자 정주영’ 기록해 역사 왜곡”

인물로 본 울산정치사’는 이번으로 마감하게 된다. 2015년 7월 ‘울산헌정사’로 시작된 ‘울산정치사’는 지금까지 2년 동안 약 100회 연재했다. 당초 계획은 20대 총선까지 연재할 예정이었으나 편집상 12대 총선으로 마감하게 된다.

그동안 언급된 울산의 정치 인물만 80여명이 넘는다. 이중에서도 가장 많이 언급되었던 인물이 우석 이후락이다. 우석이 국회의원을 지낸 시간은 길지 않다. 10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5공화국의 등장으로 10대 국회는 6년의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2년 여 만에 문을 닫고 말았다.

정치적으로 보면 이때부터 우석은 내리막길을 걷게 된다. 그런데도 ‘울산헌정사’에서 우석이 가장 많이 언급된 것은 그 만큼 울산사회에 끼친 그의 영향력이 컸기 때문이다.

울산은 해방 후 많은 정치인들을 배출했지만 우석만큼 울산을 사랑한 사람도 많지 않다. 이 때문에 아직도 가장 많은 얘기가 남아 있는 정치인이 우석이다. ‘울산정치사’를 연재하면서 독자들의 호응이 가장 뜨거웠던 인물 역시 우석이었다.

그러나 이런 그의 줄거리 있는 삶에 반해 그의 흔적은 쉽게 사라졌다. 그가 울산에 올 때마다 머물렀던 석천의 별장 육석정이 사라진 것은 이미 세상 사람들이 모두 아는 얘기다. 그러나 최근에는 그의 생가마저 소리 없이 남의 손에 넘어갔다.

우석의 생가는 ‘울산학성 이씨 근제공 고택’ 바로 곁에 있었다. 생가는 화려하지 않았다. 우석이 태어난 해가 1924년이고 이 집이 2~3년 전 팔렸으니 이 집은 거의 90여 년 동안 이씨 집안의 소유로 있었던 셈이다. 우석은 이 집에서 태어나 울산농고를 다니기 위해 교동 누나 집으로 나올 때까지 이 집에서 기거했다.

우석이 서울로 간 후부터 이 집은 오랫동안 이씨 문중 산소 관리인이 기거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몇 년 전부터는 집 내부를 고쳐 우석의 동생 거락씨가 거주했다. 거락씨는 우석이 권력의 중심에 있을 때 부산진경찰서장과 마포경찰서장을 지내다가 5공화국 군사정권이 들어서면서 강제로 예편되었다.

거락씨가 거주할 때는 그의 아들 동휘씨도 이 집에 주소를 두었다.

우석이 떠난 후에도 문중 사람들이 이 집을 헐지 않고 그대로 둔 것은 이 집을 우석 기념관으로 만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최근 우석의 장남 동진씨의 부인 서옥로 여사가 직접 울산으로 와 이 집을 팔아 갔다. 문중 사람들은 “당초 문중은 육석정을 우석 기념관으로 만들 계획이었지만 팔렸다. 우석의 생가라도 고쳐 기념관으로 지을 생각이었지만 우석의 며느리가 이 집을 팔아가는 바람에 이제는 기념관마저 지을 공간이 없어졌다”고 아쉬워하고 있다.

우석은 생전에 부인 정윤희 여사와의 사이에 동진, 동훈, 동익, 동욱 등 4남 1녀를 두었다. 아들들은 모두 당시로는 부잣집에 장가를 들었다.

동진은 박정희 정권 때 호남정유 사장을 지냈던 서정귀씨 딸과 결혼했다. 둘째 동훈은 한화그룹의 전신인 한국화학 사위가 되었다. 현 김승연 한화그룹 회장의 누나가 동훈씨 부인이다. 셋째 동익은 국제변호사로 일찍 미국으로 들어가 그곳에 살았다. 넷째 동국은 SK 창업자 최종건 회장의 사위가 되었다.

우석의 사후에 대해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우석은 운명 후 국립대전현충원에 묻혔다. 그는 1961년 육군 소장으로 예편했다. 예편 전 장면 국무총리 직속 중앙정보연구위원회 정보실장으로 발탁되었다. 그런데 당시 최경록 장군이 우석에게 군복을 벗고 정보실장 일을 하라고 해 예편했다.

우석의 부모 산소에 대해서도 궁금하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부모 산소는 모두 석천에 있다.

박 대통령이 서거했던 날의 우석 행적에 대해서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지금까지는 박 대통령이 서거했을 때 우석이 석천 별장에 있다가 일본 전 수상 후쿠다의 전화를 받고 상경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나 이번에 우석의 조카 이동휘씨를 통해 당시 우석의 행적이 정확히 밝혀졌다. 우석이 당시 석천 별장에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에게 박 대통령의 서거를 가장 먼저 알렸던 인물은 신현학 당시 부총리였다.

이동휘씨에 따르면 박 대통령이 운명하는 날 자신이 우석의 용산 집에 있었는데 자정이 조금 지난 후 신 부총리가 전화로 우석을 찾았고 그래서 둘이 통화가 되었다고 한다. 이후 우석은 밤새도록 차를 몰아 울산에서 용산 집으로 왔고 박 대통령이 서거한 다음날 아침 신 부총리와 최규하 총리가 집으로 찾아와 그들을 만났다고 한다.

이동휘씨를 통해 밝혀진 또 다른 사실은 우석이 평소 10대 총선 결과를 놓고 상당히 아쉬워 했다는 것이다. 그에 따르면 10대 총선 무렵 이미 우석의 국무총리 내정에 대한 얘기가 중앙 정가에서 있었는데 이 선거에서 당초 계획했던 10만 표를 얻지 못해 총리 계획이 무산되었다고 한다.

우석은 10대 총선에서 당시 자신의 정치적 라이벌로 부여에서 출마했던 김종필 전 국무총리를 의식해 김 전 총리보다 많은 득표를 해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선거결과는 김 전 총리가 부여에서 90% 이상의 표를 얻은데 반해 우석은 전체 투표율의 50%도 얻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우석의 자서전 집필 역시 궁금증이었다. 우석은 생전에 이병주씨를 자주 만났고 실제로 이씨를 통해 자서전을 쓸 계획을 세웠다. 5공화국이 들어선 후 우석이 태국에서 열린 세계불교신도대회에 참석할 때는 홍콩에서 녹음테이프까지 사 자신의 자서전 내용의 일부를 구술했다고 한다. 20여개가 되는 이 테이프는 이동휘씨가 갖고 있었으나 이사 중 잃어버렸다.

우석 문중 사람들이 지금도 아쉬워하는 것은 울산에서 차츰 사라지고 있는 우석의 흔적이다.

문중 사람들에 따르면 우석의 울산 업적 중 가장 자랑스러운 것이 후학 양성을 위해 울산에 많은 학교를 건립한 것이다.

우석의 건학 이념은 우석이 권좌에 있을 때 울산에서 활동했던 최성만 부산일보 기자의 에세이집 <흘러간 세월, 돌아보는 삶>에 잘 나타나 있다. ‘이후락 선생의 공적과 생애’라는 소제목에서 그는 “울산대학교는 우석의 울산대학 설립을 기념하기 위해 교내 건축물 중 하나를 고인의 호를 따 ‘우석관’이라는 이름을 붙였는데 이 이름이 언젠가 ‘조형관’으로 바뀌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최씨는 또 “울산이 공업도시가 된 후 고급인력의 양성이 필요해 영국정부의 지원으로 울산공과대학 설립이 추진되어 1969년 4월 8일 이후락, 이관, 이동철, 정주영, 김창원 등 5명의 이름으로 학교법인 ‘울산공업학원’이 설립되고 초대 이사장에 이후락이 취임했다. 그런데 울산대학교는 학교 설립 30년사를 집필하면서 설립자를 정주영으로 기록해 학교 건립의 역사를 왜곡했다”고 진술하고 있다.

최씨는 또 “2002년 울산시가 <울산시사>를 발간하면서도 ‘교육편’에서 울산대학교 설립과 관련 울산대학교 초대 이사장을 정주영으로 해 놓은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우석은 2009년 10월31일 향년 85세로 서거했다. 이렇게 보면 그의 흔적 지우기는 그가 타계하기 전부터 시작되었다. 그의 울산 사랑을 생각하면 그의 흔적 찾기는 울산의 정체성 찾기 차원에서 진행되어야 한다.

우석은 누구보다 울산을 사랑했다. 그의 울산 사랑은 그가 중앙의 권좌에 있을 때 울산의 많은 젊은이들을 불러올려 요직을 맡겼고 그리고 울산에 많은 학교를 건립한데서 잘 나타나고 있다. 최근들어 우석의 가족들과 문중은 그의 기념관 건립을 계획하는 등 우석 흔적 찾기 운동을 벌이고 있다.

그러나 생전 우석이 그의 가족과 문중만 사랑한 것이 아니고 울산의 자연과 사람을 사랑했다는 것을 생각하면 이런 운동에 울산시민 모두가 참여하는 것이 당연할지도 모른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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