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그림 이상열

 

광개토태왕이 대가야 하령왕에게 말했다.

“네 놈은 짐의 성격을 모르는가. 신라왕과 백제왕처럼 나에게 무릎을 꿇는 자는 노객(奴客·신하)으로 삼지만, 거란의 모용처럼 반항하는 자는 목을 치고 삼족을 멸했다.”

하령왕이 핏발 선 눈으로 광개토태왕을 노려보며 말했다.

“과거 너희 구려놈(고구려인을 비하하는 말)들은 나의 조부를 참수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를 능욕했다. 구차하게 노객으로 사느니 이대로 죽어 중음신을 떠도는 원귀가 되어 네 놈의 사대육신과 혼백을 뜯어먹을 것이다.”

“네 놈의 만용은 패자의 발악일 뿐 진정한 용기가 아니다. 백제의 아신과 신라의 내물은 거짓으로 항복하여도 짐이 관용을 베풀어 종통과 사직을 보존하게 했다. 과연 네 놈의 방자함이 어디까지 가는지 한번 보자.”

광개토태왕은 하령왕의 삼족 스무 명을 대가야성의 대정전 뜰에 무릎을 꿇렸다.

“족간이 먼 놈부터 목을 치되, 네 놈의 입으로 그만할 때까지 벨 것이다.”

하령왕의 조·숙·형·질·손 스무 명이 포승줄에 묶여 하령왕의 목전에서 처분을 기다리고 있었다.

“베어라!”

광개토대왕이 참수의 명을 내리자 망나니가 칼을 휘둘렀다. 하령왕 종조부의 손자의 목이 뎅겅 날아가 땅에 뒹굴었다. 숙질의 아들, 백부의 손주들, 백숙과 형제들의 목이 차례대로 꽃잎처럼 뚝뚝 떨어져 대정전 앞 품계석은 붉은 핏물로 작은 시내를 이루었다. 척족 중에 목숨에 미련이 남은 자들은 광개토태왕에게 목숨을 구걸하거나 하령왕을 원망했다.

사랑하는 여동생 보옥이 두려움에 온몸을 떨며 ‘오빠, 제발 그만이라고 말해. 나 살고 싶어’라고 말할 때 하령왕의 마음은 찢어질 듯 아팠다.

그러나 하령왕은 처연한 눈으로 바라만 볼 뿐 끝내 혀에 붙은 말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망나니의 칼에 18개의 수급이 품계석 위로 떨어진 뒤 마침내 임산부인 여옥왕비의 차례가 되었다.

광개토대왕이 하령왕에게 말했다.

“네 놈이 가야의 야만적인 순장풍습 때문에 수많은 족척의 죽음조차 파리 목숨처럼 하찮게 여기는 건가? 임산부인 네 아내의 죽음에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인가?”

대가야 왕비 여옥은 죽음 앞에서도 위엄과 품위를 잃지 않았다. 동백꽃은 떨어지기 전 가장 아름답듯 왕비의 모습은 더욱 아름답고 우아했다.

망나니가 칼을 번득였다.

“그만!”

우리말 어원연구 꽃은 산스크리트어-영어사전에 ‘kosa’(flower)로 나온다. 동국정운과 훈몽자회에는 ‘곳 花’로 나와 꽃은 조선시대 표준어인 한양어에서 변형된 언어로 보인다. 강상원 저, <한글고어사전실담어주> <조선고어실담어주석사전>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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