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로 본 울산정치사’ (1)최영백 여사와 석등이 있는 집

▲ 숙연정이 마당에 있는 경주 교동의 ‘석등이 있는 집’은 고헌의 부인 최영백 여사의 친정이다. 최 여사는 고헌이 순국한 후 한동안 이 집에서 가족들과 함께 고생을 하면서 살았다.

1898년 최여사 17세·고헌 15세 결혼
천석꾼 딸-만석꾼 아들 만남이었지만
전 재산 독립운동에 사용해 빈털터리
고헌 순국후 친정집 더부살이 선택
아들 내외·손자 이끌고 동생집 전전
집안 정자 숙연정에 방 만들어 기거도
경주 교동 ‘석등이 있는 집’ 정원에
숙연정과 신라시대 유물 놓여 있어

고헌 박상진은 울산이 낳은 대표적인 독립운동가다. 최영백 여사는 고헌의 부인이다. 우리들은 풍찬노숙을 하면서 독립운동을 펼친 독립운동가들의 애국적인 행동을 고마워하지만 그들이 독립운동을 펼치는 동안 그의 가족들이 겪은 고생에 대해서는 간과하기 쉽다.

최 여사 역시 고헌이 독립운동을 하는 동안 많은 고통을 겪었다. 경주에는 최 여사가 겪었던 고통을 보여주는 흔적이 여러 곳 남아 있다.

최 여사는 현교씨 딸로 최부자집 장손 문파 최준과 4촌간이다. 현교씨는 부모로부터 논 300마지기를 상속 받았지만 근면 성실하게 살아 나중에 천석꾼이 되었다. 그는 딸 영백 외에도 아들 영철과 영록을 두었다.

최 여사와 고헌은 1898년 결혼했다. 고헌의 나이 15세 때이고 최 여사는 두 살이 많은 17살 때다. 이때만 해도 최 여사는 부러울 것이 없었다. 친정이 천석꾼 부자였고 남편이 만석꾼 아들이었다. 결혼 후 고헌은 왕산 허위 문하에서 공부를 했고 1901년에는 문중을 이을 장남 경중을 낳았다.

고헌이 독립운동에 뛰어 든 것은 1912년 대구에 상덕태상회를 설립하면서다. 최 여사가 고생을 시작하게 된 것이 이 무렵이다. 고헌은 부친으로부터 물려 받은 전 재산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집을 비우는 일이 잦아지면서 왜경의 감시도 심해졌다.

만석꾼 며느리가 하루아침에 땟거리를 걱정해야 했다. 자녀를 키우고 집안 살림을 꾸려가는 것도 모두 최 여사 몫이었다.

고헌은 대한광복회를 결성한 후 총사령이 되고 독립운동에 비협조적인 친일부호들을 처단하다가 1917년 체포되었다. 이후 4년간 옥중 생활을 하다가 1921년 대구 감옥에서 순국했다.

최 여사가 경주 친정으로 온 것은 고헌이 순국 한 2년 뒤인 1923년이다. 이때는 이미 울산의 송정 집도 넘어가 집도 절도 없는 처지였다. 당시만 해도 양반집에서는 ‘출가외인’이라 해 여자가 시집을 가면 친정으로 돌아오는 것을 금기시했다.

우리나라 양반을 대표하는 경주 최부자 집 출신의 최 여사가 이런 금기를 깨고 더부살이를 하기 위해 친정으로 왔던 마음이 얼마나 아팠을까. 그는 이 때 혼자 몸이 아니었다. 아들 응수 내외와 이들이 낳은 손자 위동까지 동행했다.

최 여사는 처음 더부살이를 둘째 동생 영록씨 집에서 했다. 딸린 가족이 많다보니 한 집에 살기 미안해 집안에 있던 숙연정에 방을 만들어 이곳에서 살았다. 숙연정은 최 여사 조상들이 풍류를 즐기기 위해 조선 중기 만들었던 정자다.

해방 후 숙연정은 경주를 대표하는 문화공간이 되지만 최 여사가 친정살이를 위해 왔을 때만 해도 퇴락해 기둥만 있었을 뿐 전기도 살림도구도 없었다.

숙연정이 해방 후 유명하게 된 것은 신라문화재 백일장 출품작품을 이 정자에서 심사했기 때문이다. 백일장은 매년 영록씨 집에서 가까운 계림에서 개최되었다.

백일장 작품 심사를 숙연정에서 한 것은 영록씨의 아들 영식이 근화중고교 교사로 있으면서 경주에서 문화 활동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영식씨는 해방 후 신라문화재 창단에도 앞장섰다. 정자에서 심사를 할 때는 김동리, 유치환, 윤경렬, 이근식 등 경주문화계 인사들이 모두 심사위원으로 참석했다.

최 여사 가족들이 숙연정에서 산 기간은 3~4년 정도다. 이후 그는 숙연정 이웃에 있던 큰 동생 영철씨 집으로 가 이곳에서 몇 년 더 살았다.

최 여사 가족들은 최 여사가 친정살이를 하는 동안 한 때 월정교 인근 단칸방에서도 살았다고 말하지만 이곳이 어디인지 확실히 알 수 없다.

영철씨 집은 최 부자 집에서 영록씨 집으로 들어오는 입구에 있다. 규모로 보면 600여 평의 대지를 가진 영록씨 집 보다 훨씬 크다.

건립 350여년이 되는 이 집은 마당에 큰 사랑채가 있고 사랑채를 지나면 최 여사가 머물렀던 안채가 있다. 안채에는 일자형 긴 마루가 놓여 있는데 최 여사가 머물렀던 방 앞에는 따로 큰 마루청을 두었다.

이 마루청은 동편으로 창이 있고 창을 통해 반월성이 훤히 보인다. 건물 규모에 비하면 최 여사가 가족들과 머물렀던 방은 좁아 불편이 많았을 것 같다. 최 여사는 1930년 울산으로 다시 올 때까지 이 방에서 머물렀다.

영철씨 집은 규모가 크고 아름답지만 해방 전후 우환이 끊이지 않았다. 영철씨는 슬하에 두 명의 아들을 두었다. 그런데 장남 대식이 일본에서 유학까지 하고 돌아왔지만 해방 후 좌익 활동을 해 가족전체가 고생을 많이 했다.

둘째 아들 역시 명석했지만 젊을 때 영면해 부모 가슴에 못을 박았다.

울산으로 왔던 최 여사는 송정에서 살다가 1957년 부산으로 갔다. 그때까지만 해도 울산과 경주밖에 몰랐던 그가 부산으로 간 것은 먹고 살기 위해서였다. 울산으로 다시 왔을 때는 천석꾼의 딸도 만석꾼의 며느리도 아니었다. 먹여 살려야 하는 식구들만 많았다.

돈 벌이를 위해 최 여사는 부산 당감동에서 닭을 키웠다. 당시만 해도 당감동은 화장터가 있던 부산의 변두리였다. 양계는 잘되지 않았다. 도둑이 닭을 훔쳐가는 일이 잦았고 한번은 닭장에서 불이 나 탄 닭을 부전시장까지 가져가 헐값에 파는 등 고생을 많이 했다.

이무렵 최 여사는 또 하나의 사건에 휘말려 마음고생을 했다. 해방 후 고헌 집안은 경주 최씨 문중을 상대로 재산 싸움을 벌였다. 고헌은 일제강점기 독립운동을 하면서 자신의 전답을 처가인 경주 최씨 문중에 담보로 맡겨 놓고 돈을 빌려 이 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썼다. 그런데 이에 대한 양 집안의 생각이 달랐던지 고헌 집안에서 최씨 집안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최 여사로 보면 친정과 시가가 서로 재산 싸움을 한 것이다. 이러다보니 최 여사가 증언자로 법정에 설 수밖에 없었다. 이 소송에서 최 여사가 어느 편을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동생 영록씨가 누나인 최 여사 편을 들지 않고 최씨 문중 편을 들었다는 것을 보면 최 여사는 시가인 고헌 집안의 편을 들었을 것으로 보인다.

이 소송은 내용이 워낙 복잡해 지금까지도 둘 중 누가 옳았는지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고 있다. 다만 법정은 이 소송에서 최씨 문중의 손을 들어주었다. 이후 이 사건으로 양가가 반목해 오랫동안 서로 내왕하지 않았다.

최 여사는 해방 후 부산에서 살 때도 동생 영록씨 집을 자주 찾았다. 최 여사의 조카며느리로 시고모인 최 여사가 이집에 들리는 것을 자주 보았다는 김시자(86)씨는 “시고모가 키가 훨씬 크고 인물이 좋았지만 해방 후 우리 집을 드나들 때는 이미 가세가 기울어서인지 얼굴에서 웃음을 찾을 수 없었다”면서 “당시만 해도 우리 집안이 법도를 지키는 양반 집안이 되어 시고모가 가족을 데리고 친정살이를 하면서 고생을 많이 했을 것”이라고 회상했다.

그는 또 시고모가 “우리 집에 들리면 특히 손자 훈을 좋아해 훈을 자주 업어주곤 했는데 그는 돌아가기 얼마 전에도 친정으로 와 훈을 업어 준 후 부산으로 가 숨을 거두었다”고 회상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훈은 김 여사 아들로 현재 부인 이숙희씨와 함께 최 여사가 친정살이를 했던 집에 ‘석등이 있는 집’이라는 간판을 걸어 놓고 약과와 유과, 식혜 등 우리 전통 음식을 팔고 있다. 가게 이름을 ‘석등이 있는 집’으로 지은 것은 집 정원에 옛날 흥륜사에서 가져 온 석등이 놓여 있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이 집에는 석탑과 승탑 등 신라시대 유물이 많다. 그리고 모과나무, 탱자나무 등 수 백년 수령의 나무들이 많아 경치가 아름답다. 이숙희씨는 경주로 오기 전 서울중앙박물관에서 해설사로 일했다.

최 부자집을 찾는 울산사람들 중에는 이 가게를 찾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이들 중 이 가게가 옛날에 고헌 부인 최 여사가 살았던 집이라는 것을 아는 사람들은 없다.

최 여사는 1963년 부산에서 숨을 거두었다. 그는 생전에 고헌과 합장해 줄 것을 유언으로 남겨 후손들이 그를 내남에 있는 고헌 무덤에 합장했다.

숙연정에서 보면 멀리 남산이 한 눈에 들어온다. 일제강점기 남편을 조국에 바쳤던 최 여사가 이 정자에서 어려운 시집살이를 하면서 사철 모습을 달리하는 남산을 어떤 시선으로 보았을 지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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