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울산대곡박물관이 광역시 승격 20주년을 맞아 기획한 ‘鶴城(학성), 학이 날던 고을 울산’ 특별전이 흥미를 더해가고 있다. 울산의 상징인 학 문화를 조명한 이번 특별전은 지난 5월30일 개막하여, 지금까지 5000여 명이 관람했다.

전시에서는 울산 역사 속의 학과 관련된 각종 문헌기록과 자료, 학에 관한 여러 가지 이야기를 소개했다. 여기에는 새로 찾아낸 문헌도 있으며 지역 사회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한 자료도 있다. 이번 특별전에 관심을 가져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리며, 남은 기간 더 많은 분들이 관람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하다.

학은 철새이지만 학을 좋아했던 조선시대 선비들은 학을 길러 가까이에서 보려고 했다. 이런 사실은 박지원의 <양반전>과 홍만선의 <산림경제> 등 여러 문헌에서 볼 수 있으며, 서유구의 <금화경독기>에는 야생 학을 잡아 길들여 기르는 방법에 대해 기록했다.

하지만 울산에서 학을 길렀던 사실을 알려주는 기록을 찾을 수 없어 아쉬웠다. 그런데 지난 6월30일 울산대곡박물관 6월 ‘문화가 있는 날’ 행사에서 울산대학교 성범중 교수는 새로운 기록을 소개했다.

송호(松壕) 류정(柳汀, 1537~1597)이 지은 시 가운데 ‘학을 기르다(養鶴)’가 있다. 그는 부친을 따라 울산에 정착하여, 임진왜란 때 울산과 경주 등에서 공을 세우고 팔공산에서 순국했다. 그는 “학은 본디 깊은 늪에 있거늘, 어찌하여 송호(松壕)와 짝이 되었는가? 아름다운 새장에서 기르는 법을 알 수만 있다면, 고개의 달빛 속으로 높이 날아가지 않으리”라고 읊었다. 류정의 시를 통해 16세기 후반 울산지역에서도 학을 길렀음을 알 수 있다.

울산과 학에 관한 이야기의 시작은 신라시대까지 올라간다. 신라 말 박윤웅(朴允雄)은 울산지역 호족으로 등장하여 신학성(神鶴城) 장군이라 불렸다. 901년(효공왕 5) 쌍학(雙鶴)이 온통 금으로 된 신상(神像)을 물고 계변성 신두산에서 울었다고 한다. 박윤웅은 고려 태조의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웠으며, 흥려부의 지배자가 되었다. 이후 고려 성종은 ‘학성(鶴城)’이란 별호(別號)를 내려주었다.

조선시대에 학 문화는 계승되었는데, 울산의 관아 이름에는 ‘학’자가 많이 들어가 있다. 울산 동헌의 이름은 일학헌(一鶴軒)·반학헌(伴鶴軒)이라 불렀고, 동헌 정문은 가학루(駕鶴樓)라 했으며, 울산 객사는 학성관(鶴城館)이라 했다.

학 문화는 대곡천 유역의 명소인 반구대 일원에서도 꽃피었다. 이곳은 국보 제285호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와는 다른 곳이다. 반구대와 대곡리 암각화는 1㎞정도 떨어져 있다. 1375년(우왕 1) 언양으로 귀양 왔던 포은 정몽주는 반구대에서 시름을 달래며 시를 지었다. 이 시에 학이 표현되어 있다.

조선시대에 많은 관리와 시인묵객이 반구대를 찾아와 경치를 감상하고 시를 지었다. 반구대는 정몽주의 자취가 있다고 하여 포은대라 불렸고, 이 바위면에 ‘圃隱臺(포은대)’ 글자를 새겼다. 운암 최신기는 1713년(숙종 39) 반구대 바로 맞은편에 집청정(반구정)을 지었다. 그가 반구대 바위면에 ‘盤龜(반구)’ 글자와 학 그림을 새겼다. 학 그림은 3백년이 넘은 것이다.

근대까지 반구대·집청정을 찾았던 많은 시인들이 지은 시를 필사하여 책으로 만든 것이 <집청정시집(集淸亭詩集)>이다. 이 시집에 실린 한시 406수 가운데 80여 수에 학이 표현되어 있다. 반구대·집청정 일원은 울산지역 학 문화의 중심 장소였던 것이다.

현재 울산에는 학이 날아오지 않지만, 1962년 울산 공업센터 지정 이전까지 학은 울산에 왔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울산의 자랑으로 변모한 태화강 생태 복원의 최종 목표는 학이 찾아올 수 있는 환경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광역시 승격 20주년인 올해는 울산 시민들이 지역사에 좀더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좋은 기회이다. 학 문화를 통해 바라본 울산 역사문화는 어떤 모습인지 전시실에서 한 번 확인해 보시기 바란다.

신형석 울산대곡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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