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안준호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20년째 살아온 울산은 어느새 제2 고향
산업도시답게 시민들 경제수준 높아
경제적 안정은 정신건강에도 긍정효과
불안장애·자살률 등 전국 최저수준

최근 글로벌 불황에 삶의 기반 흔들리자
걱정과 불안 호소해오는 환자 많지만
모두들 지혜 모아 위기를 기회로 삼길

울산에 내려간다고 했을 때 친구들은 언제 돌아올 거냐고 물었다. 20년 전 울산대학교병원이 설립되고 정신과에서 근무를 시작할 때였다. 당시만 해도 울산에 와 본 사람이 거의 없었고, 사람들은 웬만하면 서울을 떠나지 않으려 했으니 그런 짐작을 할만 했다. 같은 해에 울산은 광역시로 승격했다. 천만 인구가 밀집된 서울에서 살던 나는 사람 많은 것을 장점으로 여긴 적이 없었기에 울산 인구가 백만을 넘었다는 것이 좋은 일인지도 몰랐다.

살아보면 알게 되고, 정들면 고향이 된다. 과연 울산은 숨겨진 보석 같은 곳이었다.

우선 자연이 다채롭다. 근처 대왕암공원에서 바닷길을 걸을 수 있고, 주말에 1시간이면 가지산의 풍광에 닿을 수 있다. 태화강은 생명의 강으로 부활했고, 울산의 공원 면적은 10배 이상 늘었다. 부모님은 가끔 울산에 오시면 감탄하신다. “어쩌면 소나무, 참나무 잎이 이렇게 깨끗할까? 서울의 나무들은 매연이 묻어 까맣던데. 여기 나무들은 고향을 잘 타고 났구나.” 이제 울산은 나에게 제 2의 고향이 되었다.

지난 20년간 진료실의 풍경도 달라졌는데 그 중에는 통신 기기의 발달도 한 몫했다. 근무 초기에는 항상 삐삐(무선호출기)를 차고 다녔다. 삐삐가 울리고 병동 전화번호와 숫자 ‘8282’가 더해서 뜨면 응급상황이라서 급히 근처의 유선전화를 찾아야 했다. 수시로 연락을 해야 하므로 초기에 나온 커다란 휴대폰을 늘어진 혁대에 차고 다녔는데, 멀리서 보면 영락없이 카우보이가 권총을 찬 것 같았다. 10여년 뒤에는 종이차트가 없어졌고, 요즘은 회진을 돌면서 스마트폰으로 진료기록을 확인하고 있으니 격세지감이다. 그렇다고 손만 까딱하면 되는 것은 아니다. 암센터가 생기고 대학병원의 규모가 커진 덕분에 타과 협진을 하려면 한두 정류장 거리를 걸어야 한다. 길 떠나기 전 스마트폰에서 협진 환자들의 병실 위치를 확인하고 다녀올 동선을 머릿속에 그려본다.

환자들이 호소하는 문제도 변했다. 초기에는 알코올의존 환자들이 많아서 병동에서 그룹치료를 할 수도 있었지만 요즘은 드물다. 당시에는 근로자가 일은 고되고 휴식은 짧으니 음주 외에는 스트레스를 해소할 만한 방법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주 5일제가 시행되고 나서는 여가시간을 보내는 방법이 여행, 등산, 운동, 사진, 연주 등으로 다양해졌다. 업무와 여가의 균형, 그리고 노후 생활을 생각하면 다행스러운 변화다.

울산은 자연만 아름다운 곳이 아니다. 산업도시 울산은 전국에서 경제수준이 제일 높은 도시이기도 하다. 큰 부자가 많다기보다는 안정된 직장이 많다. 경제적 안정은 정신건강과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지난 2006년과 2011년에 전국적으로 정신질환실태역학조사를 실시했다. 울산은 동구에서 조사하였으므로 울산 전체로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우울증이나 불안장애를 가진 사람의 비율이 전국 타 지역의 반 정도에 불과했다. 자살률도 타 지역에 비해서 매우 낮은 편이다. 2005년부터 10년간 우리나라 7대 광역시의 자살률을 비교해보아도 울산은 거의 항상 제일 낮은 수준을 유지해왔다.

안정된 직장은 치료와 회복에도 큰 힘이 된다. 누구나 살다 보면 우울증이나 정신병에 걸릴 수 있다. 만일 직장인이 중증 우울증이나 조현병이 생겼다면 적절한 치료를 받고 수개월간 충분히 회복한 뒤에 직장에 복귀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이러한 경우 울산에 있는 세계적 기업들의 복지제도는 든든한 버팀목이 되어준다. 근로자에게 충분한 휴식을 허용하고 복귀 후에는 업무 적응을 돕는다. 근로자는 자신이 쌓아왔던 능력을 다시 발휘하게 되니 결국 회사도 만족한다. 의사도 다른 걱정 없이 진료에 전념할 수 있다. 이를 보면 지역 산업이 꾸준히 발전하고 기업이 성장해온 덕분에 우리가 누려온 안정과 복지가 얼마나 소중한지 알 수 있다.

울산이 살기 좋은 곳이긴 하나 우리나라 도시 중에 세계적으로 알려진 곳은 아니다. 모임에서 외국 학자에게 내가 사는 도시를 소개할 때가 있다. 서울에서 온 사람은 수도 서울에서 왔다고 간단히 말하면 그만이다. 나는 울산을 소개하면서 월드컵 개최 도시이자 대한민국에서 가장 부유하고 여유 있는 도시라고 덧붙인다. 외국 학자의 눈이 조금 커진다.

나는 어쩌다 보니 이렇게 아름답고 풍요로운 도시에서 20년을 살아온 것에 마음으로 감사한다. 하지만 울산도 세계 불황의 여파를 비껴가지는 못하는 것 같다. 특히 동구 지역은 몇 년간 조선업의 불황으로 심각한 어려움을 겪고 있다. 처음 겪는 실직의 위험은 당황스럽고, 삶의 기반을 흔들어놓는다. 오랫동안 외래 진료를 받으면서 잘 지내오던 분들도 다시 걱정과 불안을 호소하기 시작한다.

이제야말로 지혜를 모으고 울산의 저력을 발휘할 때다. 미약하나마 마지막 응원 한 줄 보내고 싶다. 아자, 아자. 힘내라 울산, 더 라이징 시티 울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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