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4)야학 김재호 박사 추모비 건립

▲ 지난 17일 야학 김재호 박사 서거 42주기를 맞아 추모비건립 추진위원들과 유가족이 야학의 고향인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서 야학의 높은 뜻을 기리는 추모비 제막식을 가졌다. 야학은 60~70년대 옥교동에서 대동의원을 운영하면서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군사독재에 항거했고 울산 문화의 발전을 위해 서도회, 수석회, 국악회, 시조회 등 각종 문화단체를 만드는데 앞장섰다.

1960년대 옥교동서 대동의원 운영
어려운 이웃들에 무료의술 펼쳤고
지역 야당인사로 군사정권에 항거
죽을때까지 대한민국 민주화 앞장
서도회·국악회·시조회·수석회 등
울산에 문화단체 만들고 활동 도와
남긴 재산 적고 동료 대부분 타계해
한세대 넘어서야 추모비 건립 가능

야학(野鶴) 김재호(金在湖) 박사의 추모비 건립이 고인의 고향인 울주군 상북면 길천리에서 지난 17일 있었다. 1975년 서거한지 42년 만이다.

동래고보와 세브란스의대를 졸업했던 야학이 부산의 의사생활을 접고 울산으로 온 것이 1960년이다. 야학은 울산으로 오기 전 경남도 보건소장으로 결핵환자들을 돌보았고 부산에서는 내과 의사로 10여 년 동안 활동했다.

그가 울산으로 온 것은 고향 울산이 그 때만 해도 가난한 농어촌으로 어려운 환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당시로서는 울산 최고의 번화가였던 울산초등학교 앞에 대동의원 간판을 걸고 환자들을 돌보았다.

이 무렵 5·16을 일으킨 군사정권이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국민의 여망을 외면하고 독재 정치를 하자 울산의 야당 인사들과 함께 군사정권에 항거했다. 이후 그는 운명할 때까지 이 나라 민주주의를 지켜내기 위해 많은 고생을 했다.

20여년 넘게 울산 야당의 대부로 활동하는 동안 대동의원은 야당 인사들의 사랑방이 되었다. 60~70년대만 해도 울산이 야당 도시로 각인된 것은 그의 이런 활동과 무관치 않다. 그는 정치의 민주화만 요구한 것이 아니다. 공업도시 울산이 문화도시가 될 수 있도록 울산서도회, 국악회, 시조회, 수석회를 창립하고 스스로 회장직을 맡아 이들 문화단체들의 활동을 도왔다.

그의 문화사랑과 관련 이날 밝혀진 비화가 있다. 지천우씨는 야학이 수석과 분재에 심취해 있을 때 그와 함께 활동했던 인물이다. 지씨는 이날 “야학이 수석과 분재도 사랑했지만 이에 못잖게 울산 문화인들의 생활 향상을 위해 힘쓴 어른이었다”면서 야학과 함께 울산에 문화인촌을 건립하기 위해 함께 다녔던 얘기를 했다.

지씨에 따르면 야학이 선거에 출마하기 직전 “앞으로 울산문화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울산에서 활동하는 문화인들의 생활이 안정되어야 하고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문화인들의 거주지 마련이 필요하다”면서 그와 함께 옥동 군부대 앞 산야를 여러 번 둘러보았다고 밝혔다.

지씨는 “이 계획은 선생님이 갑자기 선거에 나서는 바람에 미뤄졌고 이후 선생님이 너무 일찍 운명하시는 바람에 무산되고 말았지만 만일 그 때 이 사업이 이루어졌다면 울산 문화인들의 생활은 물론이고 울산 문화 자체가 크게 비약했을 것”이라고 아쉬워했다.

비 건립 추진위원 20여명과 가족 등 100여명이 참석한 이날 모임에서 가장 주목을 받은 사람은 노덕순(69)여사였다. 노 여사는 1964년부터 야학이 서거할 때인 1975년까지 대동의원 간호부로 활동했다.

노 여사는 단순히 간호부로만 활동하지 않고 병원을 찾는 야당 인사들과 문화인들에 대한 접대까지 했다. 노 여사는 병원을 떠날 때만 해도 20대 중반의 처녀였지만 이미 칠순을 내다보는 할머니로 이날 나타났다.

야학의 그림자 역할을 했던 노 여사는 야학이 울산 수석회 회원들과 함께 탐석을 갈 때는 커피포트에 뜨거운 커피를 가득 담아 회원들에게 대접했다. 당시만 해도 커피가 기호품이 되어 회원들에게 커피를 대접하면 그렇게 고마워할 수 없었다고 회상했다. 탐석은 울산에서 가까운 경주와 포항에서도 이루어졌지만 때로는 점촌과 멀리 남한강에서도 행해졌다.

노 여사는 또 “한평생 박애정신으로 무료진료를 많이 하고 야당 인사들이 찾아오면 식사 대접은 물론이고 용돈까지 넉넉히 주어 보내었던 선생님이 9대 총선에서 낙선했을 때는 울산시민들이 원망스러웠다”고 말한다.

노 여사는 “특히 9대 총선에서 선생님과 경쟁을 벌였던 최형우 후보는 선거전까지만 해도 병원을 자주 찾아와 선생님을 받들었는데 하루아침에 경쟁자가 되어 다투는 것을 볼 때 가슴이 아팠다”고 회상했다.

노 여사는 야학이 자신의 치료를 위해 세브란스 병원으로 갈 때도 동행했다.

“서울에 가기 전 이미 선생님은 자신이 중병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저희들에게는 폐렴이라고 숨기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 환자들을 돌보았습니다.”

서울로 갈 때는 앰뷸런스를 타고 갔는데 앰뷸런스가 대구 인근에서 다른 차에 받히는 바람에 대구에서 내려 다시 기차를 타고 서울까지 가야했다.

세브란스 병원에서 처음에는 세브란스 간호사들이 주사를 놓았지만 나중에 노 여사가 주사를 잘 놓는다는 것을 알고 병원이 야학 주사는 노여사가 직접 놓도록 했다.

야학이 입원해 있는 동안 울산은 물론이고 전국에서 많은 방문객들이 찾았다. 야학은 이들을 만날 때마다 자신이 곧 완쾌되어 울산으로 갈 것이라고 말했다. 방문객 중 노 여사가 지금도 잊지 못하는 사람이 이희호 여사다. “선생님이 입원했을 때 김대중 대통령은 진주 교도소에서 옥중 생활을 하고 있어 김씨를 대신 해 이 여사가 병원을 방문, 선생님을 위로하고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이 여사가 돌아 간 직후 병실 입구에 ‘외래 손님 출입금지’라는 팻말이 붙어 이후 김 박사는 가족들 외에는 누구도 만날 수 없었습니다.”

야학은 세브란스에서 한 달 정도 입원했다가 병원의 권유로 다시 울산으로 와 집에서 잠시 시간을 보낸 후 운명했다.

그는 운명 전 자녀들에게 ‘정직하게 살아라’는 말을 남겼다. 시간적으로 보면 이날 추모비 건립은 늦은 감이 있다. 인간의 한세대를 30년으로 보는데 서거한지 한세대가 훨씬 넘어 비가 세워졌다.

비가 이처럼 늦게 세워진 것은 야학 서거 후 가족들이 경제적으로 어려웠기 때문이다. 야학은 생전에 많은 사람들을 도왔지만 정작 자신이 타계한 후에는 가족들에게 남겨 놓은 재산이 없었다.

최야학과 함께 활동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미 운명한 것도 비 건립이 늦은 요인이다. 지금은 고인이 된 울산의 유명 인사들 중 생전에 야학의 추모비를 세워야 한다는 주장과 함께 비 설립 계획을 세운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이들 대부분이 이를 실천에 옮기지 못하고 타계했다.

형우 전 내무부 장관과 심완구 전 울산시장 등 야학의 정치 후배들 중 정치적으로 울산에 큰 발자취를 남긴 사람들이 많다. 그러나 최 전 장관은 야학이 서거한 후 얼마 되지 않아 선거구를 부산으로 옮겼다.

이렇게 보면 심 전 시장이 시장 재직 중일 때만 해도 야학과 함께 한 사람들이 많았기 때문에 이 때 세웠더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추모식에 정치인들이 한명도 보이지 않은 것은 더 큰 아쉬움이다. 물론 야학과 함께 정치활동을 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미 고인이 되었다. 혹은 살아 있다 해도 거동이 불편해 추모회에 참석하지 못한 사람들도 있다.

울산에는 시구의회 의원들을 제외하더라도 현 국회의원만 6명이나 되고 전직 국회의원들도 있다. 추모식에는 이들의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았다. 야학은 여야와 시대를 뛰어 넘은 정치인이었다. 그는 개인 영달과 특정당의 권익을 위해 정치를 하지 않았다.

7대 대선 때 여당의 이동철 울산시선거관리위원장은 선거위원들이 개표 직전 박정희 후보의 표를 무더기로 투표함에 넣다가 발각되는 바람에 검찰의 수사를 받아야 했다. 당시 울산 야당 인사들은 이 사건을 놓고 이씨를 구속시켜야 한다면서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데모를 강렬하게 벌였다. 이 바람에 당시 윤동수 시장이 구속되고 이씨 역시 옥살이를 해야 할 운명에 놓였다.

이 때 이씨가 찾았던 인물이 야학이었고 야학이 야당 인사들에게 데모를 멈출 것을 지시해 이 위원장이 옥살이를 피했다. 요즘 정치인들이 이런 야학의 정치 스타일을 배운다면 우리정치가 좀 더 국민들로부터 존경을 받을 수 있을 것 같다.

울산출신 국회의원들 중에는 강길부 의원만 다른 일정이 바빠 행사에 참여하지 못한다는 연락을 사전에 해 왔다. 선배 대접에 이처럼 야박해서는 울산 정치의 발전은 기대하기 힘들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울산은 이후락, 최형우 의원 등 울산 발전을 위해 일한 사람들의 공덕비를 금명간 세워야 할지도 모른다. 40여년이 넘은 야학의 비가 이날 세워질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유활열 추진위원장의 헌신적인 노력 때문이었다. 유씨는 오래 전 야학과 문화 활동을 함께 했던 인연을 잊지 않고 추모비 건립에 앞장섰고 과거 야학의 높은 뜻을 지금까지 잊지 않던 20여명의 추진위원들이 동참해 비가 세워지게 되었다.

이날 참석한 사람들은 울산 정치의 발전과 후학들의 교육을 위해 야학 추모집도 발간되기를 희망했지만 이 사업이 이루어지기는 당분간 쉽지 않을 것 같다.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