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울산왜성(蔚山倭城) 제5편 임진왜란 이후 울산왜성의 변화

▲ 1910년대 울산왜성 전경과 영호정.

전쟁 직후 벤치마킹론
조명연합군 1여년 공격했지만
끝내 함락하지 못한 ‘철옹성’
전후 조선 군대서 활용론 대두

60여년후 왜성 성격 약화
전쟁의 상흔 점차 아물게되자
문인묵객들 유람 장소로 각광
백일장 개최하고 별장 짓기도

문화콘텐츠는 풍부해져
임진왜란후 모습·성격 바뀌며
왜성·공원의 기능까지 더해져
경관감상 기능 전망대 둘 수도

한중일(조선·명·일본) 동북아 국제전투(도산성 전투, 울산왜성 전투)는 1597년 겨울에 시작하여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사망을 계기로 그 해 겨울 막을 내렸다. <선조실록> 106권, 선조31년(1598) 11월25일 기사에는 ‘도산(島山, 울산왜성)의 왜적이 그들의 소굴을 모두 불태우고 남김없이 철수하였습니다. (중국의) 마귀제독이 군사를 거느리고 성으로 들어가고, 또 일부는 추격하고 있습니다’라고 당시 상황을 기록하고 있다.

▲ 1910년대 울산왜성의 정상부.

기록을 보면, 왜군은 퇴각할 때 그들 스스로 울산왜성을 무너뜨리고 간 것을 알 수 있으며, 한편으로 1여 년에 걸쳐 조명연합군이 합심하여 왜성을 격퇴하려고 노력했으나, 끝내 함락하지 못했음도 짐작할 수 있다. 조명연합군이 울산왜성을 함락하지 못한 이유는 연합군을 이끈 명나라 장수의 전략적 오판(誤判)이 있기도 했지만, 태화강을 바로 옆에 끼고 급경사에 견고하게 쌓은 왜성의 입지적 특성도 한몫 하였다. 그래서 망우당 곽재우는 울산왜성에 대해 ‘비교할 수 없이 견고하고, 함락시킬 수 없는 성’이라고 평가했으며 ‘독립적인 산(山)을 이용하여 교묘하게 쌓은 성’이라며 우리나라(조선)의 성곽과는 다른 점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울산왜성의 특성 때문에 전쟁이 끝난 후 조선 군대 내부에서 적극 활용하자는 ‘울산왜성 활용론’이 대두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선조실록> 133권, 선조34년(1601) 1월17일 기사에서 ‘이덕형이 아뢰기를…울산(蔚山)의 좌병영(左兵營)을 순시하고…도산(島山, 울산왜성)의 군영(군대)에도 방어 진지를 쌓고 많은 기계(器械)와 군량(軍糧)을 쌓아두었다가 급한 일이 있을 때면 그 성과 함께 성패를 같이하여 장졸(將卒) 모두가 안정된 뜻을 갖게 해야 일을 할 수 있습니다’라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 1910년대 울산왜성의 선입지(船入址).

전쟁 후 울산왜성에 조선의 군영을 둔 모습이 어떠했는지는 명확하지 않지만 왜군들의 배가 드나들었던 선입지(船入址)를 울산도호부 전선(戰船, 전투선박)의 정박 장소로 1654년까지 활용한 것을 보면, 어느 정도 짐작은 가능하다.

전쟁이 끝난 1599년 전후 시기의 울산왜성에는 전투에서 싸우다 장렬히 전사한 조선과 명나라 병사들의 혼을 달래고 제사지내기 위해 제단(祭壇)과 사당(祠堂)을 조성하였으며, 울산왜성을 찾았던 많은 문인들은 당시의 치열했던 전쟁을 기억하고 잊지 않기 위해 기념 시(詩)를 주로 남겼다. 한준겸(韓浚謙, 1557~1627)은 ‘천 리 산천에 왜적들의 성곽이 남았으니 명나라 군대가 두 해 동안 싸웠지…’라고 하였고, 배대유(裵大維, 1562~?)는 도산(島山)이라는 시(詩)에서 ‘울주의 외로운 성 하나, 수목은 아름다워도 한탄이 그치지 않네’라며 전쟁의 아픔이 여전함을 표현하였다.

하지만 이런 분위기는 전쟁이 끝난 지 60여 년을 넘기면서 점차 바뀌기 시작하였다. 이동영(李東英, 1635~1667)은 ‘도산으로 놀러가세…멋진 풍경이 한 눈에 들어올 것이라네’라고 했으며, 이준민(李俊民, 1736~1799)은 ‘증성(왜성)에 오르다(登甑城)’라는 시에서 ‘태화강은 동틀녘 안개 속에 푸르네…태평성대의 유람은 정말 즐거워…’라고 하였다. 한걸음 더 나아가 울산왜성 가까이의 반구동 일원에 구강서원을 조성한 과정을 기록한 <구강서원고왕록>에서 ‘1681년 4월8일 동천(東川, 어련천)의 제방 쌓는 일을 마치고 울산도호부사 김수오(金粹五)가 술과 음식을 마련하여 병마절도사 김세익(金世翊)과 증성(甑城)에 올라 관등놀이를 하였다’는 내용을 찾아 볼 수 있다.

즉 임진왜란 이후 2세대(60여 년)가 지나는 동안 전쟁의 상흔이 점차 아물게 되어 왜성으로서의 성격은 점차 약화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훨씬 더 후대에 해당하는 1872년에는 부사 이희성(李羲性)이 왜성의 정상부 일원에 장변정(壯邊亭)이라는 정자까지 지었는데 ‘강과 바다가 도산의 주변에 펼쳐 있고, 동남쪽으로 시야가 넓게 트여 있다’고 설명한 것을 볼 때, 도산(島山, 울산왜성)이 경관감상의 장소로 정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873년 4월8일에는 왜성에서 백일장이 개최되기도 하였으며 이후 한때는 석불(石佛)을 모셔두기도 했다.

세월이 조금 더 지난 구한말~근대기에 이르는 시기에는 울산의 사업가로 활동한 추전(秋田) 김홍조(金弘祚, 1868~1922)가 청안이씨 집안으로부터 도산(島山)을 매입하여 경영하였다. 울산왜성 정상부 동쪽 가장자리에 요산대(樂汕臺) 비석을 세워 주변의 경관을 감상하게 하였고, 울산왜성의 2지환에는 별장(別莊)을 지어 영호정(永護亭)이라고 이름 붙였다. 요산(樂汕)의 의미는 ‘물과 산(●+ 山 = 汕)이 즐겁다’인데, 여기서의 물은 태화강과 동천이며, 산은 현재 사라지고 없는 삼산(三山)을 지칭하는 것이다. 그리고 영호정은 이 건물이 영원히 잘 남아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아 지은 이름이지만 현재는 그 흔적을 찾아보기 어렵다. 다만 당시 촬영된 일본식 영호정의 사진을 통해, 근대기 누정건축의 변화상을 엿볼 수 있을 뿐이다.

이와 같이 울산왜성은 임진왜란 이후 몇 차례에 걸쳐 모습과 성격을 바꾸어 왔으며 심지어 공원(公園)의 기능까지 덧붙어 더욱 복잡미묘한 느낌을 자아내고 있다. 성격이 변해왔다는 것은 많은 이야기들이 누적되었다는 것이며 이것은 곧 문화콘텐츠가 풍부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산(島山)은 임진왜란 이전에 산봉우리의 끝이 뾰족하게 붓(筆)처럼 생겼다고 하여 필봉(筆峰)이라고 불렸는데, 왜군이 점거하여 산 정상부를 평평하게 잘라내어 떡시루(甑)를 엎어 놓은 것처럼 바뀌면서 증성(甑城)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생기게 되었다. 이로써 도산은 산정상부에서 주변을 둘러보기 좋은 전망대의 성격이 발현되었다. 즉 임진왜란 이후 울산왜성(도산)은 경관감상과 직결된 문화콘텐츠가 부각되었고, 그 것은 현재까지 이어오고 있기 때문에 울산왜성 정상에 전망대 기능의 시설물을 둘 수도 있다고 사료된다.

이처럼 울산왜성은 오늘도 꿈틀거리고 있다. 활용되지 못하고 있는 수많은 콘텐츠들은 도심이 되살아나는데 밑거름이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이창업 울산광역시 문화재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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