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울산의 초기국가-우시산국을 가다

▲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 하대 유적에서 발굴된 세발 다린 청동솥.

실체 파악할만한 자료 부족
<삼국사기>에 단편적 기록
하대유적 등 가능성 뒷받침
4세기 전반 신라 복속 추정

‘역사’라면 고리타분하게 여기는 청소년이 많다. 세계사와 한국사 및 왕조사에는 관심이 많지만 본인과 가족의 삶터인 지역사 공부에는 유난히 인색한 시민들이 적지않다. 때마침 울산광역시승격 20주년을 맞아 울산의 선사와 역사시대를 관통하는 단 한 권의 역사책 <울산을 한 권에 담다>가 최근 발간됐다. 본보는 책 속 내용을 좀 더 쉽게 시민들과 공유하고자 이를 함께 읽어보는 장을 마련한다. 울산의 역사문화를 시대나 사건에 한정하지 않고 통사로 알아보는 기회이자 현재의 울산, 한걸음 더 나아가 내일의 울산을 조망하는 계기가 될 것이다.

울산은 예로부터 외국의 선박이 무시로 드나들던 신라 제일의 국제항구이자 왕도인 금성으로 들어가는 관문이었다. 이처럼 바다를 주요 배경으로 삼은 울산에는 비교적 이른 시기에 독립된 정치세력, 초기국가 ‘우시산국’이 출현해 일정 기간 존속했다고 추정된다.

울산의 지리적 위치로 보아 3세기 무렵 초기국가가 존재했으며, 이는 울산권역 내에 다수의 청동기 취락 유적과 논밭 유적에서 나타난다. 또한 울주군 웅촌면 대대리의 하대, 다운동, 대안리 등에서 발견된 목관묘와 목곽묘 유적은 그 가능성을 뒷받침한다. 목관묘는 청동기와 철기 등 새로운 금속문화를 배경으로 만들어진 문화로, 정치공동체인 읍락이 만들어지고 그들 간의 결속을 통해 초기국가가 출현했음을 시사한다.

특히 우시산국의 향방은 <삼국사기>에서 단편적인 기록으로 남아있다. <삼국사기> 권44, <열전거도전>에서는 ‘거도는 그 족성을 잃어버려 어디 사람인지 모른다. 탈해이사금을 섬겨서 간이 되었다. 이 때에 우시산국(于尸山國)과 거칠산국(居柒山國)이 인근 경계에 끼어 있어 자못 나라의 근심거리가 되고 말았다’고 전해진다. 울산시사의 공동저자인 주보돈 경북대학교 교수는 여기서 우시산국을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주 교수는 “우시산국은 사로국과 인접해 있으며 바로 곁에는 거칠산국이 자리했다고 하는데, 거칠산국은 오늘날 부산의 동래에 중심지를 둔 국가”라며 “따라서 우시산국은 경주의 사로국과 동래의 거칠산국 사이에 끼인 곳이므로 위치상 울산을 제외하고 달리 상정하기 어렵다”고 말했다.

▲ 하대 유적에서 발굴된 새장식 뚜껑항아리.

그러나 <삼국사기>의 <신라본기>나 <지리지>에는 울산의 초기국가와 관련된 기록을 찾기가 어렵다. 울산이나 울주란 지명이 신라시대에는 보이지 않지만, 고려시대에 우벌이나 우시산이 군현 재편 과정에서 한문식으로 고쳐지면서 나타나기 시작했다고 보고 있다. 이에 우시산국의 정치적 중심지는 현재의 웅촌면 일대로 추정된다. 3세기의 청동솥을 포함한 다량의 유물이 나온 하대고분군은 이러한 사실을 입증하기에 손색이 없다.

다만 초기국가였던 우시산국은 당시 하나의 정치권으로 결속되지 못하고 두 개 이상의 권역으로 나뉘어 이합집산을 되풀이했던 것으로 보인다. 이에 3세기까지만 해도 존재했던 우시산국은 4세기 전반 주변국들과 함께 신라에 복속·편입된 것으로 추정된다.

주 교수는 “현재 초기국가의 구체적 실태를 보여주는 기록은 드물고 국명만 겨우 전해질 따름이다. 최근 몇몇 발굴을 통해 고고자료가 늘어가는 추세지만 이것만으로 전모를 밝히기에는 부족하다”며 “따라서 한국고대사 전반의 흐름 속에서 울산지역 초기국가의 성립과 구조를 더듬어 볼 수밖에 없다”고 덧붙였다. 정리=이우사기자 woosa@ksilbo.co.kr <울산을 한 권에 담다> 참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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