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7)이시모토 키즈에(石本日技)와 방어진지도

▲ 이시모토 키즈에(石本日技)는 일제강점기 방어진에서 태어나 이곳에서 살다가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갔다. 그런데 최근 그가 일제강점기 살았던 옛 방어진을 회상하면서 지도를 정확히 그려 지도를 보는 사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다.

1927년 울산 방어진에서 태어나
심상소학교 나와 조합비 수납일 맡아
매일 방어진 일대 누벼 지리에 밝아
해방 이후 19세때 日 히나세로 돌아가
2011년 친구 아들 울산 방문소식 듣고
옛 기억 회상하며 설명도 곁들여 그려

해외여행을 하다보면 일본 사람들이 한국인과 중국인들에 비해 조용하다는 것을 알게 된다. 질서를 잘 지키고 기록을 좋아하는 것도 일본인들의 특징이다. 해설자들의 설명을 자세히 들으면서 기록을 하는 일본 관광객들을 어디서나 볼 수 있다.

최근 동구문화가 발표한 이시모토 키즈에(石本日技)의 방어진 지도는 일본인들이 얼마나 기록을 소중히 여기는 지를 보여준다.

이시모토는 일제강점기인 1927년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해방 후 일본으로 돌아간 그는 2011년 그가 어린 시절을 보냈던 일제강점기 옛 방어진을 기억하면서 마을 지도를 그렸다. 팔순이 훨씬 넘은 그는 달력 뒷면에다 지도를 그렸다.

일제강점기 방어진에서 살았던 일본인들은 해방 후 대부분 일본 히나세로 돌아가 이곳에 모여 살면서 ‘방어진회’라는 모임을 만들어 서로 옛 방어진 생활을 회상하면서 살아가고 있다. 이시모토도 다른 지역으로 시집을 가기 전까지는 히나세에 살면서 이들과 정담을 나누었다.

이시모토는 그의 아버지가 한일합방 무렵 우리나라에 와 방어진에 안착했다. 아버지는 수산업을 했는데 이시모토는 1927년 방어진에서 태어났다. 어린 시절을 방어진에서 보냈던 그는 방어진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졸업 후 특별히 할 일이 없었던 그는 매달 심상소학교 학교조합비를 거두는 일을 했다. 그리고 조합비를 거두기 위해 해방이 될 때까지 매일 방어진 일대를 누벼 누구보다 방어진 지리에 밝았다.

방어진심상소학교는 현 방어진초등학교 전신으로 일제강점기 일본인 자녀들이 주로 다녔다. 학교재정은 자녀를 이 학교에 보낸 학부형들이 매달 내는 학교조합비로 충당했다.

해방 후 19세 나이로 히나세로 갔던 그는 그곳에서 잠시 살다가 히나세에서 멀지 않은 사나끼시마로 시집을 가 지금도 그곳에서 살고 있다.

그가 방어진 지도를 그린 것은 히나세에 살고 있는 미시자끼(西崎)가 방어진을 방문한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이다. 미시자끼는 지금도 히나세에 살고 있는 이시모토 친구 아들인데 최근 방어진을 방문했다. 이시모토는 미시자끼에게 “내가 방어진에서 살 때만 해도 방어진에는 일본사람들이 많았는데 일본인들이 철수한 후 방어진이 어떻게 변했는지 궁금하다”면서 “이 지도를 갖고 가 각종 시설물을 비교한 후 돌아와 설명을 자세히 해 달라”고 당부했다. 지도는 미시자끼가 방어진으로 오기 전 옛날 방어진을 회상하면서 밤샘을 하면서 그렸다.

미사자끼가 이 지도를 갖고 방어진으로 온 것이 2011년이다. 당시 그는 히나세 교육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방어진과 히나세는 오래전부터 자매결연을 맺고 매년 초등학교 학생들의 방문을 추진했는데 2011년에는 미사자끼가 히나세 초등학생들을 데리고 방어진으로 왔다.

동구문화원은 미사자끼가 갖고 온 지도가 일제강점기 방어진을 연구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고 판단해 ‘2017 울산민속문화의 해’ 도록에 이 지도를 올렸다.

이시모토는 단순히 지도만 그리지 않았다. 지도에 표기해 놓은 시설물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해놓았다. 그는 지도 옆에 ‘70여 년 전의 옛 추억을 더듬어 그려보았습니다. 시간이 오래되어 달라 진 것이 많겠지만 저의 어린 시절 추억으로 보아주면 고맙겠습니다.’는 글도 실었다.

방어진 신사(현 용왕사) 옆에는 ‘광장’을 그려 놓고 ‘이 광장에서 수많은 젊은 병사들이 나라를 위해 흩어져 갔습니다. 지금의 평화에 감사드립니다.’는 글도 써 놓았다.

실제로 1938년 6월2일 동아일보는 이 신사와 관련 ‘방어진에 살았던 권동학의 아들 환덕(19)군이 왜병에 입소하는 행사를 방어진 신사에서 치렀는데 3000여 명의 읍민이 이 행사에 참석해 권군의 무운을 빌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당시 이시모토가 12살이었으니까 이 행사를 보았을 수도 있다.

또 ‘꽃바위’에 대해서는 ‘반딧불이를 좇고 제방에서 산나물을 뜯고 냇가에서 빨래를 하던 즐거운 추억이 있었던 장소’라고 말하고 있다.

또 항구 한쪽을 그려놓고는 ‘부산으로 가는 연락선이 북쪽에서 출발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중간에 없어져 확실하게 기억이 남아있지는 않습니다.’라고 양해를 구하고 있다. 지도 위 상점 중에는 특별히 ‘점(店)’이라는 표시를 따로 해 놓고 ‘점(店)’으로 표시가 된 상점은 상점 주인이 한국인이었다는 설명까지 덧붙여 놓았다.

이외에도 이 지도에 나타나는 시설물 중에는 하리마야 목욕탕, 해삼섬(슬도), 방어진심상소학교, 시누키야 여관 등 현존하는 건축물도 적지 않다.

목욕탕 시설은 당시 울산 읍민들이 부러워할 정도로 방어진이 잘되어 있었다. 따라서 일제강점기 이를 부러워한 울산읍내 주민들이 당시 일본인이었던 울산 읍장을 찾아가 항의한 기사가 있다.

1937년 1월 5일자 동아일보는 울산 읍민들이 가쯔라(桂登利藏) 읍장을 찾아가 “방어진에는 목욕탕이 3곳이나 있는데 울산 읍에는 한군데도 없다”면서 성토를 했다는 기사를 싣고 있다.

지금도 수협 인근에 있는 시누키야(讚岐屋) 여관도 이시모토는 지도 속에 표기해 놓고 있다. 시누키야 여관은 이시모토가 방어진에 있을 때 최대 시설을 갖춘 여관으로 조선총독부의 고위직 인사들이 울산에 오면 반드시 이 여관에서 숙식을 했다.

실제로 1936년 2월에는 제6대 우원(宇垣)총독이 방어진항 시찰을 위해 방어진에 왔고 1939년 11월에는 대야(大野) 정무총감이 울산에 온 후 방어진과 장생포를 둘러본 후 부산으로 갔다. 이들은 방어진에 있는 동안 이 여관에서 휴식을 취했다.

당시 방어진 중심부에 있었던 혼간지(本源) 사찰도 정확히 그려 놓고 있다. 일제강점기 동축사, 월봉사와 함께 동구 3대 사찰의 하나였던 이 사찰 인근에는 큰 광장이 있었다. 그리고 이 광장에는 결핵환자들을 격리시키는 병막이 있었는데 이에 대한 설명도 자세히 해놓고 있다.

혼간지에서 동남으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상반관(常盤館)도 그려 놓고 있다. 동아일보는 1937년 10월 3일자 신문에서 ‘방어진 常盤館 확장’이라는 제목 아래 ‘방어진항의 유일한 오락기관 상반관은 울산 내 유일의 극장으로 알려져 있는데 읍 승격 후 방어진의 약진을 보여주는 손색없는 건물로 확장공사에 착수해 읍민의 기대에 어그러짐이 없도록 할 것으로 보인다’고 보도하고 있다.

일제강점기 상반관은 1920년대 이미 일본인들을 위해 건립된 영화관으로 스크린 문화도 방어진이 울산 읍보다 앞섰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외에도 혼간지 왼편으로 8개의 집을 그려 놓고 “이 집은 하나의 지붕 아래 8칸이 나뉘어 있는 집으로 당시 가장 큰 어업회사였던 대양어업의 직원이 살았던 기숙사였다”고 설명해 놓고 있다. 그러면서 그는 “당시 대양어업은 방어진에서 제일 큰 공장으로 마을 주민 중 대양어업 직원들이 많았다”면서 “패전으로 타격이 컸을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시모토가 얘기하는 대양어업은 당시 방어진에 본진을 두고 동해 전 지역에서 수산업을 벌였던 나까베 이쿠지로(中部畿次郞) 회사를 말한다. 나까베는 일제강점기 방어진에 하야시가네(林兼) 상점 등 대규모 일본 상점과 수산업 가공업소 그리고 조선소를 세웠다. 방어진 방파제를 만들고 요코하마에서 발전기를 가져온 후 도심에 설치해 방어진 전체가 전기 혜택을 볼 수 있도록 했던 인물도 그였다. 그는 이시모토가 학교조합비를 거두었던 방어진심상소학교를 세운 인물이기도 하다.

방어진 읍민들은 읍사무소와 우체국을 자비로 건립하기도 했던 그의 행적을 높이 사 1928년 방어진심상소학교 서편 정원에 그의 송덕비를 세우기도 했는데 이 비는 해방과 함께 파괴되어 없어지고 말았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실제로 당시 방어진에 거주했던 일본인의 80%가 나까베 회사에서 일을 했을 만큼 그는 많은 회사를 갖고 있었다. 당시 방어진에 나까베가 운영하는 회사 직원들이 얼마나 많았나 하는 것은 하리마야 목욕탕이 나까베 직원들을 위한 전용 목욕탕이었다는데서 알 수 있다. 이 목욕탕은 지금도 당시 시설을 내부만 일부 개조해 방어진에서 손님들을 받고 있다.

일제강점기 방어진보다는 일본인들이 적었지만 울산 읍에도 적지 않은 일본인들이 살았다. 그리고 여관과 병원, 관공서 등 일본 시설물이 즐비했다. 시간이 더 흐르기 전 이시모토처럼 자세히 당시 울산 읍 지도를 그리고 시설물에 대한 설명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울산에는 없을까 궁금해진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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