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8)이보영과 새마을운동

▲ 1970년대 말 어촌 새마을운동으로 전복을 양식해 동구의 주전 마을을 새마을사업의 메카로 만들었던 이보영씨가 당시 새마을운동을 설명하고 있다. 왼편에 당시 KBS가 이씨의 새마을운동을 특집으로 만들어 방영한 시나리오가 보인다.

1974년 주전어촌계장으로 있을때
온산·진하 등 전복양식 소식 듣고
주전앞 선돌바위 일대 종묘 뿌려
새마을운동 성공사례 대상 받아
청와대·해외도 주목…TV방송도
지역 농민들 위해 홈골저수지 축조
제당 통합으로 재물 낭비도 막아

울산 동구 주전 마을은 60년대 초 울산이 시로 승격된 후에도 한동안 울산의 자그마한 어촌에 불과했다. 그런데 주전이 새마을운동을 통해 전국 명소가 된 배경에는 이보영(88)씨의 힘이 컸다.

이씨의 새마을운동으로 주전은 한때 어촌 새마을운동의 명소가 되어 새마을지도자들이 전국에서 구름처럼 모여들었다.

이씨 역시 개인적으로 영광을 안았다. 서울 구경을 하는 것이 하늘의 별 따기보다 힘들었던 시절 새마을운동 성공 사례를 발표하느라고 서울을 문지방이 닳도록 오르내렸고 선진지 견학을 위해 일본과 대만도 다녀왔다.

이런 인물을 매스컴이 가만히 둘리 없다. KBS는 이씨의 새마을사업을 ‘어촌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어촌 새마을 성공사례 특집으로 만들어 전국에 방영했다. 특집에서 이씨의 대역으로 나왔던 연기자가 백일섭씨였다. 백씨는 특집을 찍기 위해 주전 마을에 머물렀고 이때 이씨 집에서 숙식을 했다.

새마을운동은 근면·자조·협동으로 시작되는데 이씨는 어릴 때부터 근면을 터득했다. 1930년 주전에서 태어났던 그는 인근에 초등학교가 없어 남목초등학교까지 매일 새벽밥을 먹고 등교했다. 보통 학생들이 걸어서 한 시간에 가는 학교를 이씨는 남목고개를 뛰어다니면서 40여 분만에 도착했다. 초등학교 졸업 후 아버지를 돕던 그는 6·25가 일어나는 바람에 입대했다.

당시 주전에서는 무려 70여명의 청년이 입대했다. “지금도 제가 자랑스럽게 생각하는 것은 당시 많은 젊은이들이 전쟁을 피해 몸을 숨겼으나 주전에서는 애국심을 갖고 스스로 지원한 청년들이 많았다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한동안 주전은 일할 젊은이들이 없어 노약자들까지 바다로 나가야 했다.

 

전쟁이 끝나고 보니 입대했던 많은 청년들이 전사했다. 이씨 역시 금화와 철원전투에서 죽을 고비를 여러 번 넘겼지만 구사일생으로 살아남아 1955년 제대했다. 그는 당시 전우들을 못잊어 최근 마을 주민들과 합심해 주전 마을에 참전기념탑을 세웠다.

제대 후 마을에서 부지런히 일하고 있는데 초대 주전 어촌계장을 지냈던 황바우씨가 추천해 1974년 어촌계장이 되었다. 이때만 해도 주전은 해녀들과 머구리들이 바다에 들어가 잡아오는 해산물로 주민들이 겨우 살아갔다. 어촌계장이 되었을 때 그는 이웃 마을의 장해출 선배가 온산과 진하 등 타 지역 어촌에서 새마을사업으로 전복을 키워 재미를 보고 있다면서 전복을 양식하자고 제안했다.

“당시만 해도 주전은 자연산 돌미역이 유명해 이를 외지에 팔아 어민들이 근근이 살아가고 있었는데 장 선배로부터 이 소리를 듣는 순간 난류와 한류가 교차 하는 주전에 전복을 양식하면 성공할 수 있다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전복 양식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우선 행정절차가 까다로워 전복 양식허가가 힘들었다. 해녀들과 머구리들의 반대도 만만치 않았다. 전복 양식의 경우 종패가 상품이 되기 위해서는 3년을 기다려야 했다. 그동안 해녀와 머구리들은 물론이고 마을 어민들 역시 바다 접근이 금지되기 때문에 마을 주민 전체가 그동안 무엇을 먹고 사느냐면서 반대했다. 반대는 주민들만 한 것이 아니었다. 서생과 당월 등 이웃에서 주전으로 와 해산물을 채취했던 해녀와 머구리들도 합세해 이씨를 못살게 했다.

“지금 생각해도 90년 가까운 내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때가 그 무렵이었습니다. 금화와 철원하면 6·25때 격전지로 유명한데 당시 일선에서 전투를 할 때도 그처럼 하루하루가 길지 않았습니다.”

당시만 해도 정부지원이 없어 전복 양식을 하려면 어민들로부터 종패 구입비를 거두어야 했다. 이씨는 종패 구입비로 가구당 5000원씩 거두기로 하고 마을을 돌았다. 당장 굶어죽을 형편이 된 어민들이 이 돈을 선뜻 내어 놓을 턱이 없었다. 어민들이 매일 어촌계를 찾아와 고함을 질렀고 젊은이들은 행패를 부리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물러서지 않고 “3년만 참으면 주전 마을이 부자 어촌이 될 수 있다”면서 그들을 달래었다. 그리고는 포항에서 종패를 사 와 주전 앞 선돌바위 중심으로 뿌렸다.

3년이 지나자 해녀들이 기쁜 소식을 들려주었다. 선돌바위에 시커먼 큰 전복들이 엄청나게 많이 붙어 있다는 소식이었다. 이씨가 이 기쁜 소식을 가장 먼저 전한 곳이 울산수협이었다. 울산수협은 수협중앙회에 다시 이 희보를 띄웠다. 그러자 1979년 중앙수협이 창립 16주년 행사를 부평연수원에서 하면서 이씨에게 성공사례 발표를 부탁했다.

중앙수협은 또 이씨에게 새마을 성공사례 대상을 받게 해주었고 성공사례 발표 후에는 청와대로 가 박정희 대통령도 만날 수 있도록 일정을 짜주었다. 그런데 이 소식을 들은 며칠 뒤 박 대통령이 시해되는 바람에 청와대는 갔지만 상은 최규하 대통령으로부터 받았다. 이후 신문사와 방송사 인터뷰로 바쁜 시간을 보내었던 그는 다른 수상자 3명과 함께 일주일 동안 일본으로 가 일본 어촌을 둘러보았다.

귀국하니 KBS가 이씨의 새마을운동 성공사례를 특집으로 만들어 방영하겠다는 연락을 해왔다. 그리고는 KBS 카메라기자들이 서울에서 백일섭과 함께 주전으로 왔다. “처음에는 백일섭씨가 왜 주전에 왔는지 궁금했는데 백씨가 직접 저에게 전복 양식과 관련된 일을 자세히 물으면서 자신이 특집에서 저의 대리인 역할을 한다고 했습니다.”

촬영을 할 때는 백씨와 함께 이씨가 배를 타고 바다로 나아가 전복 양식을 하는 법을 자세히 가르쳐 주기도 했다.

일이 끝난 뒤에도 백씨는 가끔 이씨 집에 들려 다음날 촬영할 내용을 얘기하면서 조언을 구했다. “당시만 해도 주전은 시골이 되어 식당이 없어 KBS 직원들이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그런 중에도 백일섭씨가 가끔 저에게 남편의 바다 생활을 묻곤 해 백씨가 성실한 연기자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당시 40대 중반의 나이로 백씨를 만났던 이씨 부인 김기자(84)씨의 회고담이다.

상도 많이 받았다. 정부가 주는 ‘제2회 한국농어민 대상’을 받고 나니 곧 한국청년회의소가 ‘한국농어민대상’을 주겠다고 연락을 해왔다.

이 무렵 중앙수협 회장이 주전을 방문해 어촌계 건물을 지어주었다. 이후 주전은 새마을지도자들의 선진지 견학 명소가 되어 많은 사람들이 다녀갔다. 이 소식은 해외까지 퍼져 1985년에는 말레이시아에서도 새마을 지도자들이 방문했다.

한동안 대만까지 가 새마을사업 성공사례를 발표했던 그는 1987년 어촌계를 떠났지만 이후에도 주전 발전을 위해 많은 일을 했다.

그는 먼저 마을 뒤 언덕에 큰 저수지를 만들었다. 당시 주전마을 사람들 중에는 마을 뒤 사을(沙乙) 언덕을 개간해 농사를 짓고 있는 사람들이 많았다. 이들은 매년 한해로 고생했지만 돈이 없어 저수지 축조는 엄두도 내지 못했다. 이를 안 이씨는 이곳에 논밭이 있는 사람들을 불러 모아 삽과 곡괭이로 자그마한 저수지를 만들었다. 요즘도 있는 사을의 홈골 저수지는 이렇게 해 축조가 되었다. 그러나 이 저수지는 저수량이 많지 않아 비만 오면 서로 자신의 논밭에 먼저 물을 끌어들이려고 주민들 사이에 얼굴을 붉히는 일이 잦았고 심지어는 몸싸움까지 벌였다. 이씨는 한 마을 사람들이 물 때문에 싸우는 일이 없도록 하기위해 동구청을 찾아가 저수지 확장을 요청했고 이후 동구청에서 중장비를 보내주어 저수지를 대폭 확장해 요즘은 물 걱정을 하지 않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90년대까지만 해도 주전에는 어촌마다 골매기 신을 모셔놓고 제사를 지내는 제당이 10곳이나 되었다. 제사가 많다보니 어촌마다 제물을 많이 올리려고 경쟁을 하는 바람에 재물의 낭비가 심했을 뿐 아니라 이에 따른 시기도 많았다.

이씨는 이를 통합키로 하고 각 마을의 제주들을 모았다. 그러나 제주들은 제당에 손을 대면 화를 입게 된다면서 이씨에게 간 큰 행동을 한다고 나무랬다. 그러나 이씨는 물러나지 않고 제당 통합으로 재앙을 입으면 자신이 모든 책임을 지겠다고 강력히 밀어붙여 지금은 제당이 한 곳에만 있다.

주전마을에 최근 찻집과 펜션이 많이 들어서면서 도시인들 중 이씨를 찾아와 많은 돈을 주겠다면서 집을 팔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요청을 한마디로 거절하고 지금도 1966년 건립한 옛집을 그대로 지키면서 살아가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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