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8)잃어버린 마을들

▲ 성암근린공원. 매암 등 10개 마을의 망향탑.

댐에 수몰된 250여가구 이주민
망향비 세워둔 회야댐 망향동산

온산공단으로 자취 감춘 마을 19개
아름다운 동백섬 목도의 명성도
온산공단에 바친지 오래

울산 곳곳에 망향비·옛터비 자리
지역내 이주민 4만~5만명 달해
지금도 이주 역사는 계속되고 있어
이주 역사 집대성…유물관도 건립을

문화기행 TV 프로그램을 시청하다가 귀에 익은 곡을 따라 노래가 절로 흥얼거려졌다. ‘꿈속에 그려라 그리운 고향, 옛 터전 그대로 향기도 높아…’ 이 곡은 드보르자크 교향곡 9번 ‘신세계로부터’의 2악장에 그의 제자 피셔가 가사를 붙인 ‘Going Home’이다. 우리에게는 ‘꿈속의 고향‘으로 번안되어 잘 알려져 있다. 고향은 꿈에서라도 가보고 싶은 곳이기에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준다.

▲ 화산공원 망향대.

고향이 있어도 고향을 그리는 마음은 허기지기가 일쑤인데 고향을 아예 잃어버린 사람들의 심정은 어떠할지 가늠조차 할 수가 없다. 울산에는 꿈속에서만 고향을 그릴 수밖에 없는 사람들이 유난히 많다. 수많은 공장들에게 고향을 내주었거나 삶의 터전이 댐의 물속에 몽땅 잠겨버린 이들이다.

울산은 1962년 특정공업지구로 지정된 이래 55년 동안 우리나라 경제의 원동력 역할을 하면서 엄청난 변화를 맞았다. 울산의 동쪽은 해변으로 이어져있는데 온전히 보존된 곳이 거의 없을 정도이다. 서생면, 정자, 방어진과 장생포 해안 일부를 빼고는 공업단지가 마을을 밀어냈다. 태화강과 외황강 하구 마을들 또한 마찬가지다. 주민들은 선조들이 터를 잡아 수백 년 동안 대대손손 살던 곳을 떠나 경제개발에 기여한다는 명분을 위안 삼고 뿔뿔이 흩어졌다.

▲ 통천마을 애향비.

예부터 시인묵객이 즐겨 찾던 미포만과 전하만의 절경은 현대중공업 건설로 더 이상 볼 수 없게 되었고, 붉디붉은 동백꽃으로 상춘객을 끌던 목도(춘도섬으로 더 잘 알려져 있음)도 그 명성을 온산공단에게 바친 지 오래다. 울산의 해안이 어디 아름답지 않은 곳이 있었던가. 이를 기억하는 사람들의 안타까움이 눈부신 성장 뒤편에 웅크리고 있는데 하물며 실향민들의 슬픔이야 그 끝을 알 수 있으랴. 애통함을 참다못해 이들은 옛터비나 망향비 등을 세워 고향의 흔적을 남기고 스스로를 달래고 있다. 지자체도 망향공원을 조성하여 국가 발전에 고향을 바친 이들을 기리고 그들의 슬픔을 위로하려고 애쓰고 있다.

▲ 장현마을 애향비.

실향민의 설움 편린이라도 느껴볼 생각으로 길을 나선 건 폭염이 기승을 부리던 8월 어느 날이었다. 먼저 회야댐의 망향동산에 들렀다. 댐에 수몰된 중리, 신전, 신리, 통천 마을 250여 가구 이주민을 위로하는 망향비가 댐을 배경으로 쓸쓸히 서 있었다. 댐의 통천초소 옆에 있는 통천마을 이주민들의 애향비도 마저 살펴보고 온산으로 향했다.

▲ 처용암.

온산공업단지로 인해 자취를 감춘 마을은 당월, 대안, 목도, 처용, 신기, 회남, 회학 등 모두 19개이다. 고향을 애틋하게 그리는 1만3018명 이주민을 위한 망향비가 화산근린공원에 세워져 있고, 마을 사진과 구구절절한 내력이 담긴 19개의 빗돌들이 망향비를 호위하듯 에워싸고 있다. 정자에 올라서니 온산 앞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이는데 정겨운 어촌의 정경은 어디에도 없고 주변은 공장으로 가득 찼다.

▲ 양죽부락 옛터비.

필자도 두세 번 가본 적이 있는 춘도섬을 떠올리며 선착장이 있었던 세죽 마을로 갔다. 마을은 온데간데없고 공장만 빼곡하고, 처용암이 코앞에 보이는 선착장에는 처용공원이 조성되어 있을 뿐이다. 울산시는 마을 뒤편 해발 93미터의 동산에 성암근린공원이라 이름 붙인 망향공원을 꾸미고 있다. 여천, 매암, 고사, 용잠, 용연, 남화, 황성, 성암, 부곡, 상개의 10개 동 이주민 3만여 명의 한을 풀어주기라도 하듯 망향탑에는 환조로 새겨진 처용무가 너울거리고 있다.

망향탑에서 100m 쯤 올라가 정상에 서면 온산항과 울산신항이 마주하는 바다가 보인다. 춘도섬이 보이고 처용암도 발아래에 있다. 그러나 실향민이 그리는 고향마을은 가뭇없이 사라졌다. 정상에 지을 계획이라는 망향정은 언제 볼 수 있을지 궁금하다.

▲ 용연 옛터비.

성암공원에서 나와 현대중공업 용연공장 안에 있는 황암옛터비를 거쳐 인근에 있는 용연옛터비를 찾았다. 도로변 소공원에 있지만 철망이 쳐져있고 문이 잠겨 있어서 찾기도 접근하기도 어려웠다. 용잠로에 있는 남화동옛터비는 찾기가 쉬웠다. 가가호호 살았던 사람의 이름을 기록해 놓은 옛 마을 지도 앞에서 가슴이 멍해졌다. ‘SK가스’ 정문 근처 도로변에 자리를 지키고 있는 용잠옛터비를 살펴본 후 장생포 양죽마을로 차머리를 돌렸다.

70년대까지만 해도 남구와 동구를 오가는 나룻배 선착장이 있었던 장생포 양죽 마을 옛터비는 울산대교 아래에 있다. 이 마을 출신 서태일 시인의 ‘그리운 고향 양죽’이라는 시비가 애잔함을 더해준다.

나선 김에 울산대교를 넘어 얼마 전에 방어진 대왕암공원 입구에 이전 설치된 낙화암 쌍바위를 보러 갔다. 이 바위는 현대중공업 건설 전에 미포만 백사장에 있었는데 40년 만에 시민의 품으로 돌아온 것이다. 미포, 전하, 명덕 마을 이주민에게는 망향비보다 더 소중한 기념물이다.

대곡댐에 수몰된 다섯 마을 주민을 위한 망향비도 있고, 혁신도시에 편입된 장현 마을에도 애향비가 세워져 있다. 삶의 터전을 사연댐에 빼앗긴 한실을 비롯한 여섯 마을과 대암댐에 수몰된 둔기와 하잠 마을의 흔적은 기억 저편으로 밀려난 지 오래인데 망향비조차도 없다.

▲ 이선옥 수필가·전 문화관광해설사

울산에는 망향비가 너무나 많다. 이주민들이 떠난 땅이 남구 전체 면적과 비슷하고, 이주민이 4만~5만 명이나 된다니 그럴 수밖에 없다. 울산이 시로 승격할 때 인구가 21만 명 정도인 점을 감안하면 이주민 규모가 짐작이 간다.

공해에 시달리던 오대와 오천 마을이 최근 신산업단지에 터를 내주었듯이 이주 역사는 계속되고 있지만, 이주에 대한 기록이 빈약하다는 지적이 많다. 더 늦기 전에 이주 역사를 집대성하고 유물관 등도 건립해야 할 것이다. 국가 발전을 위해 희생하고 물심양면으로 고통 받은 이주민들에게 작은 보답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부자 도시 울산의 책무가 아닐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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