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이사품왕은 내물왕만 생각하면 승리의 예감으로 온몸의 기운이 충일하다가, 내물왕의 뒷배인 광개토태왕까지 생각이 미치면 두려움에 젖어 하늘로 치솟던 기운도 순식간에 풀이 꺾였다.

아신왕이 이사품왕에게 말했다.

“이름 그대로 미친개에 불과한 광개, 광개토를 두려워할 필요가 전혀 없소.”

“하지만 그는 전쟁에서 한 번도 져본 적이 없는 동북아의 패자요.”

“난 광개토와 4번을 싸웠소. 그런데 맨처음 광개토가 비겁하게 기습해 석현성과 관미성을 빼앗긴 것을 제외하고는 모두 이긴 싸움이나 마찬가지였소.”

아신왕은 고구려와의 4번의 전쟁, 관미성 전투, 관미성 수복 전투, 수곡성 전투, 패강 전투에서 모두 패한 건 사실이었다. 하지만 고구려군의 선제 기습공격을 당해 아리수 이북의 석현성과 관미성을 잃은 첫 번 째 전투를 제외하고 나머지 전투에서는 패배를 인정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모두 백제군이 아리수 이북으로 적진 영토 깊숙이 쳐들어간 전쟁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 관미성 수복 전투에서는 백제군이 석현성과 관미성을 포위해 공격했으나 뒤에 보급로가 충분치 못해 승리를 눈앞에 두고 통한의 후퇴를 해야 했고, 세 번째 전투에서는 수곡성에서 패퇴하기는 했지만 백제군의 용맹에 놀란 광개토왕이 평양 남쪽 지역에 일곱 개의 성을 쌓고 나오지를 않았다. 네 번째는 진무가 이끄는 백제군이 한강과 송악을 넘어 평양을 향해 곧장 진격하려 했으나 광개토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나와 패수에서 진무를 물리쳤다. 광개토왕이 나왔다는 소식을 들은 아신왕은 즉시 군대를 이끌고 송악산을 넘어 청목령까지 나아갔으나 때는 겨울이라 큰 눈이 내려 눈물을 삼키며 한산성으로 회군했던 것이다.

이사품왕이 술잔을 들이켜며 말했다.

“저는 불굴의 정신을 가진 대왕을 존경합니다. 하지만 제가 고구려의 개가 된 내물을 치면 광개토왕은 반드시 내물에게 구원군을 보낼 터, 쉽게 신라 땅을 먹기는 어려울 것이오.”

“염려 마시오. 아리수에 백제군 최정예 병력 3만을 배치해 놓아 광개토가 아무리 미친개라 하더라도 내려올 수 없을 것이오. 더욱이 내가 올 초에 연나라 모용에게 사신을 보내 군사동맹을 단단히 맺어 놓았소. 만약 고구려 병사가 신라에 대규모 구원병을 보내면 곧바로 배후에서 고구려의 수도 국내성을 치기로 맹약을 했소이다.”

“그렇게까지나 치밀하게 준비를 했단 말이오.”

아신왕이 껄껄 웃으며 탁자 위에 놓인 술잔을 들며 말했다.

“자, 그러니 염려 말고 술이나 한 잔 합시다.”

 

우리말 어원연구

아리수: 한강

백제군 최정예 병력 3만: 398년 아신왕은 다섯 번째 고구려와 전쟁을 하기 위해 한강 남쪽에서 대규모로 군대를 사열했다. 399년 진무를 병관좌평, 사두를 좌장으로 임명하고 한강 이북에 북진의 교두보인 쌍현성을 쌓았다. 마침내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한산 북쪽의 책성에 병력을 집결시켰으나 그날 밤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지자 이를 불길하게 여긴 아신왕은 공격을 중지시켰다. 고구려를 공격하기 위해 대규모의 징발과 잇따른 군역으로 수많은 백제사람들이 신라로 도망가 백제의 호구수가 급격히 줄자 아신왕은 가야왕과 왜왕과 연합해 고구려 대신 신라를 먼저 치기로 전략을 바꾸었다.

연나라 모용: 고구려의 숙적, 후연의 모용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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