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12)충의공 엄흥도와 원강서원

▲ 충의공 엄흥도를 모시는 원강서원은 두동의 치산서원과 함께 ‘충효의 도시’ 울산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세조는 단종을 시사하고 시신을 동강에 버린 후 이를 수습하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을 내렸지만 충의공은 이를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 시신을 수습했던 인물이다.

시신 거두면 삼족 멸한다는 어명에도
동강에 버려진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선산에 모신 뒤 삼동면에 숨어 살아
충의공이 죽은 뒤 인근 작동에 묻혀
이후 숙종때 충의공의 충절 알려지고
영조는 ‘조선의 충신’으로 높이 사
충의공 엄흥도 모신 온산읍 원강서원
최근까지 문중중심 향제 지내며 추모

박제상의 충절로 ‘충효의 도시’로 불리는 울산에는 재실이 많다. 이들 재실 중 충의공(忠毅公) 엄흥도(嚴興道)를 모시는 원강서원(圓岡書院)은 충효의 도시 울산을 더욱 빛나게 하고 있다.

세조는 1457년 단종을 시사한 후 시신을 동강에 버리고 시신을 거두는 자는 삼족을 멸한다는 어명을 내렸다. 그러나 충의공은 이런 어명을 두려워하지 않고 단종의 시신을 거두어 문중 선산에 묻고 어의를 챙겼다.

영월 장릉(莊陵)에 단종의 시신이 안치될 수 있었던 것은 순전히 충신 충의공이 의를 지키면서 시신을 수습했기 때문이다.

충의공 선조들 중에는 훌륭한 인물들이 많다. 시조 엄임의(嚴林義) 공은 고려 때 악장을 전하기 위해 사신으로 우리나라에 왔다가 돌아가지 않고 영월 땅을 식읍으로 받은 후 내성군(奈城君)에 봉해졌다. 충의공은 시조의 12세손으로 7대조 공유(公裕)는 중정대부 사농경으로 고려조에 출사했고 8대조 원(援)은 성균관 대사성을 지냈다.

단종의 승하를 자세히 기록하고 있는 <弘齋全書>는 충의공 행적을 이렇게 남겨 놓고 있다.

“흥도는 강원도 영월군 호장 출신이었다. 세조 3년 정축년(1457) 10월 단종이 영월 광풍현에서 세조의 사약을 받고 승하하니 모두가 두려워했으나 혼자서 곡하고 시신을 동을지(冬乙旨)로 가져와 어머니를 위해 마련해 두었던 옻칠한 관에 넣어 매장하였다. 가족들이 화가 미칠 것을 겁내어 만류하자, 흥도는 ‘좋은 일을 할 따름이다’라고 말하고 매장을 마치고 떠나갔다”

충의공은 단종 시신을 수습할 때 혼자 가지 않았다. 그는 아들 3명이 있었는데 이들과 함께 시신을 수습했다. 그가 삼족을 멸한다는 명이 내려져 있는데도 의행(義行)을 아들과 함께 한 것은 의를 위해서는 부자가 함께 죽을 수도 있다는 높은 생각을 가졌기 때문이다.

시신 수습 후 충의공이 몸을 피했던 곳이 공주 계룡산 동학사였다. 이때 아들 3명과 매월당 김시습도 함께 왔다. 충의공은 단종 어의도 함께 가져와 천도제를 올린 후 동학사 숙모전에 모셨는데 지금도 이 어의가 숙모전에 있다.

동학사에서도 신변의 위협을 느꼈던 충의공은 경주로 오던 중 첫째 아들은 청송에 두고 둘째와 셋째만 데리고 와 경주에서 잠시 머물렀다. 그러나 경주 역시 안전한 곳이 못되어 다시 울주군 삼동면 금곡 마을로 왔다.

금곡에서도 신분을 감추어야 했다. 충의공 가족들은 금곡에 사는 동안에도 출신지를 밝히지 않아 마을 사람들은 충의공 가족을 ‘경주에서 살다가 온 사람’이라고 불렀다.

이처럼 죄인 아닌 죄인이 되어 전국을 떠돌아야 했던 충의공은 금곡마을에서 숨을 거둔 후 인근 작동에 묻혔다. 이후 자식들은 충의공을 고향 땅 영월로 이장했다.

금곡 역시 안전하지 못했던지 충의공 후손들은 다시 온산으로 옮겨 온산의 가장 산골인 산성마을에서 살았다.

세조 후 200여 년 간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살았던 충의공 문중에 서광이 비친 것은 조선 19대 숙종 때다. 이에 앞서 중종 때 우승지 신상이 단종 묘를 보고 돌아온 후 단종이 승하한날 모두가 두려워 몸을 감추었는데도 엄흥도 혼자 곡을 올리고 관을 갖추어 장사를 지냈다고 보고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단종의 신원이 복원되지 않아 충의공의 의행이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숙종 7년 단종은 대군으로 복위되고 그때까지 상석 하나 없이 동을지에 묻혀 있던 단종의 무덤도 왕의 예를 갖추어 장릉으로 추봉되었다.

충의공의 충절이 세상에 알려지게 된 것도 이 때부터다. 숙종은 “공의 행동이 해와 달처럼 밟고 태산같이 높다”고 칭찬했다. 영조는 충의공 충절을 높이 사 정려각을 하사한 후 “충의공은 지금까지는 물론이고 앞으로도 나타나기 힘든 충절을 행했다”고 격찬했다.

충의공에 대한 추앙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불천위(不遷位) 은전과 증직도 받았다. 불천위는 사당에서 위패를 옮기지 말고 영구히 제사를 지내라는 뜻으로 이 패를 받는 것은 문중의 영광이었다. 증직만 해도 숙종 때는 공조좌랑, 영조 때는 공조참의와 공조참판, 순조 때는 공조판서가 가증되었다.

영조가 충의공 의행을 얼마나 높이 찬양했나 하는 것은 영조가 하사한 정려와 비문에서 알 수 있다. 영조는 정려를 내리면서 정려문 현판에 충의공을 ‘조선의 충신’으로 기록하도록 했다. 조선 왕조 500년을 통해 왕릉에 충신 정려각이 세워진 것은 장릉의 충의공이 유일하다.

영조는 또 사제문에서 “세상에 어찌 충신이 없을까 마는 흥도 같은 사람이 어디 있었겠느냐, 당시라고 어찌 관찰사와 수령이 없었겠느냐마는 일개 호장만 훌륭한 절의를 했다”면서 충의공의 절의를 격찬했다.

조정에서 서원에 내린 비석도 그의 충절을 생각해 강화도의 질 높은 돌로 만들어 강화도에서 울산까지 옮겨와 세웠다. 비석은 현재 원강서원에 있다. 오늘날 원강서원을 찾는 사람들은 조선시대 이처럼 의로운 행동을 했던 충의공을 배향하는 서원이 왜 영월이 아닌 울산에 건립되었는지 의문을 갖는다. 원강서원이 울산에 건립된 이면에는 많은 사연이 있다.

후손들이 충의공의 충절을 기리는 제사를 올리기 위해 울주군 온산읍 대정리 대안 마을에 원강사(圓岡祠)를 건립한 것이 정조 23년(1799)이다. 그런데 순조 17년(1817) 경상도 유림들이 원강서원을 단순히 문중 재실이 아닌 유림서원으로 격을 높여야 한다고 상소해 서원으로 승격되었다. 그동안 문중 단위로 향사를 했던 것을 이때부터 전국 유림들이 모여 봉행했다.

1947년 이 서원은 온산면 산성 마을로 이건 되어 제향과 함께 후손들의 훈육도 병행하게 되었다. 서원이 산성으로 옮길 때 모든 기틀을 마련한 어른이 죽헌(竹軒) 주철(柱澈)공이다. 주철공은 서원을 이건할 때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해 지붕이 허물어지고 기왓장이 떨어지고 담장이 무너지는 등 훼손되었던 서원을 모두 손질해 이건에 어려움이 없도록 했다. 당시 천석꾼이었던 주철 공은 중후한 인품으로 주위 사람들의 칭송을 받았는데 특히 1979년 <기미대동보>를 편찬할 때는 울산대동보소의 도총을 맡아 대동보를 차질 없이 발간해 문중 어른의 면모를 보였다.

1994년 산성마을이 온산국가 공단에 편입되면서 서원도 철거하지 않을 수 없어 현 위치로 이건 중건했다. 현재 삼동면 둔기리 작동마을에 있는 원강서원은 강당과 여수당을 비롯해 동제인 영수재와 서재인 형모재 그리고 묘위실과 비각, 고사를 갖추고 있다. 문중은 서원을 둔기리로 이건 할때 옛 비석의 글이 풍파를 겪으면서 판독이 어려워 새 비석을 만들어 이들 둘을 비각에 함께 세웠다. 비문의 글은 충의공이 공조판서를 받을 때의 내용으로 새 비문은 후손 두종(杜宗)이 썼다.

문중 사람들은 서원이 작동 마을에 재건축된 것이 우연이 아니고 충의공의 정령 때문이라고 보고 있다. 작동은 충의공이 영면한 후 영월로 가기 전 산소가 있었던 곳이다. 따라서 이곳에는 적지 않은 문중 산소가 오랫동안 있었는데 서원이 바로 이 산소 밑에 세워졌다.

서원이 작동으로 이건되기 전까지만 해도 향제가 열리면 전국 유림들이 참여해 마을 전체가 북적되었다. 그러나 최근에는 음력 9월18일을 향제날로 잡고 향제도 문중 중심으로 열고 있다.

문중 사람들은 조상들이 오랫동안 몸을 숨겨 살다보니 벼슬에 나설 수 없어 훌륭한 인물을 많이 배출하지 못했다고 말한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러나 이런 어려운 여건에도 영월 엄씨 문중에서는 적지 않은 인물이 났다. 고종의 비로 영친왕을 낳은 엄비와 박정희 정권때 주일 대사를 거쳐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던 엄민영씨, 조달청장을 역임했던 엄일영씨도 엄씨 문중이다.

지역 인사로는 원광대학을 졸업한 후 문학박사로 양산대 교수를 지내면서 온산읍지를 출간했던 엄원대, 일본 동경대 농학과를 졸업한 후 경북대학교 사과연구소 소장을 지냈던 엄재열, 서울법대를 졸업한 후 울주군수를 지냈던 엄창섭, 엄정인 전 울산부시장, 엄구영 전 경남도의원 그리고 중구부구청장을 역임했던 엄주호도 모두 이 문중 출신이다.

후손들이 한 때는 온산읍에 500여 가구가 살았지만 이들 마을들이 대부분 없어지면서 후손들 대부분 울산시내로 이주, 지금은 극히 적은 숫자가 온산 인근에서 살아가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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