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사랑하고 공존하기 위해 노력해야
신들도 세상을 저버리지 않을 것

▲ 김상곤 울산광역시 감사관

우리는 참을 수 없는 사회적 아픔이나 개인의 고통을 표현할 때 비극적 사건이라거나, 비극적 삶이라고 표현한다. 이때 비극, 즉 슬픈 연극은 고대 그리스 아테네에서 시작된 공연예술에서 유래한 말이다. 흔히 사용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그리스 비극 오이디푸스 왕에서 차용한 표현이고 시대에 저항하는 용감한 여성의 대명사인 안티고네 역시 그리스 비극의 주인공이다. 이들이 겪는 슬픔은 신이 정해 놓은 운명 때문이거나 개인이 감당하기 어려운 부당한 권력에 의한 것으로 모든 사람이 공감하는 스토리를 가지고 있다.

공연형태도 야외에서 무대와 관객의 구별 없이 모든 시민이 함께하는 참여하는 대중예술로 발전했다. 기원전 5세기의 그리스 비극이 오늘날에까지 끊임없이 이어져 오고 있고, 아직도 대학로에서 안티고네의 이야기가 공연되고 있는 이유도 이러한 인간본연의 슬픔에 대한 공감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지금 비극 혹은 비극적이라는 말로 삶의 고통을 표현하기 어려운 시대에 살고 있다. 삶의 쓰라림이 비극이라는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완화되었다거나 비극적 사건이 드문 시대가 되었다면 얼마나 바람직한 일이겠는가? 신이 결정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도 없고, 개인의 생명을 소홀히 하는 부당한 권력이 지배하는 사회로부터도 이미 벗어났으니 말이다.

하지만 우리는 오늘 하루도 비극이라는 말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참혹한 일들을 견디며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 아예 비극이라든가 슬픔이라든가 하는 말을 외면하면서 살아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웃 동네에서 열서너 살의 여자 아이들이 또래 친구를 집단으로 수 시간 동안 몽둥이찜질을 하는 모습을 어떤 논리로 정리하고 어떤 마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겠는가. 고참병사로부터 오랫동안 구타당해 죽은 어린 병사의 가족들에게 우리는 어떤 위로의 말을 할 수 있겠는가. 태어나자마자 엄마가 틀어놓은 가습기 때문에 평생 산소통을 지고 살아야 하는 아이에게 건넬 수 있는 언어를 우리는 가지고 있는가. 졸음운전 고속버스에 깔린 그들의 가족들에게 또 어떤 변명을 할 수 있겠는가. 가해자들 또한 우리사회의 구조가 만들어 낸 것이라 어쩔 수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겠는가.

극소수의 개인적인 일탈이 만들어 낸 사고이며, 어떤 시대에나 존재할 수밖에 없는 통계적인 현상이라고 치부하면 마음이 가벼워질 수 있을까. 아닐 것이다. 그리스 비극과 같은 운명적인 이야기도 없는, 너무나 이해하기 힘들고 너무 자주 일어나는 일들에게 무슨 이름을 붙여야 할 것인지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 것이 이 시대의 새로운 비극이다. 그것도 매일 보아야 하는 아픔이다. 이 어찌할 수 없는 아픔의 근거와 원인을 이해하고 치유하는 사유방식은 없는 것인가.

견디기 힘든 슬픔에 대한 인간의 반응은 두 가지라고 한다. 눈앞에 보이는 것을 부정하고 머릿속에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 도피하거나, 현실의 가혹함을 인정하고 가혹한 조건을 새로운 창조의 심리적 에너지로 삼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후자를 선택했다. 역병과 전쟁이 빈발하는 가혹한 상황 속에서 삶으로부터 도망치는 대신 현실을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일 새로운 사유체계를 만들었다. 그것이 바로 아테네의 그리스 신들이다.

그들의 신은 전지전능한 피안의 신이 아니라 가까운 언덕에 살면서 그들이 현실의 어려움을 견딜 수 있도록 길을 찾아주는 신이었다. 고대 그리스 인들은 이러한 신들의 도움 속에서 가혹한 운명에 대한 위안을 얻고 고통과 슬픔의 원인이 되는 모든 감정의 모습을 긍정적으로 바라볼 수 있었다. 우리에게도 이 시대의 새로운 비극을 이겨낼 수 있도록 도와 줄 신들과 그들의 이야기, 신화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리스 시대의 신들이 우리의 아픔을 위로해 줄 수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고 우리가 지금까지 의지해 온 과학과 이성의 신에게 위로의 말을 기대할 수도 없는 형편이다.

우리는 어쩌면 그 신을 알고 있는 지도 모른다. 인간과 인간 사이에 존재하는 공존과 연대의 신, 타인을 이해하고 공감하는 마음의 신. 어쩌면 이 신들이 우리에게 더 큰 범주의 사랑으로 가는 길을 안내할 지도 모른다. 이 신들이 세상을 버리지 않도록 하는 것은 우리들의 몫일 것이다.

김상곤 울산광역시 감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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