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광개토태왕은 소후 여옥과 꺽감, 수경을 보며 말했다.

“너희 세 명의 가야인들은 들어라. 난 일찍이 가야의 종통을 진멸한 것에 대해 크게 후회를 했다. 나는 단 한 번도 고구려가 정복한 속국과 신국에서 왕을 죽이거나 왕통을 없앤 적이 없었다.”

태왕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가 정복한 9국 30여 부족에서 포로로 잡은 왕과 군장들은 모두 노객이나 신하로 삼았다. 그에게 다섯 번이나 반기를 든 백제의 아신왕도 포로로 잡았을 때 죽이지 않고 노객으로 삼아 백제 왕위를 유지하도록 했다. 왕을 죽여 그 백성들의 반발을 사는 것보다 왕을 살려 군신관계, 조공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통치하는데 여러모로 유익하다는 이유도 있었다. 포로로 잡은 대가야의 회령왕을 참수한 것은 아주 예외적인 사건으로 그의 마음에 무거운 짐으로 남아 있었다.

태왕이 말했다.

“여기 영명사에 모인 질자들을 보아라. 모두 짐의 속국과 신국에서 온 왕자와 공주들이다. 그러나 가야의 꺽감만은 왕족이 아니라 후누 장군의 아들, 그것도 양아들이었다. 내가 대가야의 뇌질 가문을 아예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 꺽감이 후누 장군의 아들이 아니라 죽은 회령왕의 아들이라니 놀랍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다행한 일이 아닐 수 없다. 대가야의 왕손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태왕이 꺽감을 보며 말했다.

“꺽감, 네가 대가야의 왕자라니 놀랍다. 난 네가 그만한 혈통을 가진 인물인 줄 짐작하고 있었다. 내가 죽였다고 생각한 회령왕의 아들이 이렇게 늠름하게 살아있다니 다행한 일이다. 오늘부터 꺽감은 대가야 왕국의 회령왕의 아들임과 동시에 고구려의 공식 볼모가 되었음을 선포한다.”

“고맙습니다, 폐하.”

망나니의 칼 앞에서 생명을 건진 꺽감은 감읍의 큰절을 했다.

꺽감의 절을 받은 태왕은 소후와 수경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소후와 수경은 들어라. 둘이 보인 우정은 전쟁터에서 나누는 병사들 간의 우의보다 더 깊다. 남의 아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기의 아들을 내어주는 자가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또한 벗을 살리기 위해 자신과 아들의 목숨까지도 버리겠다는 동무가 이 세상 어디에 있겠는가. 소후와 수경은 그 지위를 유지하면서 계속해서 꺽감을 돌보도록 하여라. 이 둘의 목숨을 털끝이라도 해하려는 자가 있다면 내가 직접 칼로 베겠다. 알겠느냐!”

“예!”

모두들 지엄한 태왕의 판결에 고개를 숙였다.

그날 밤 태왕은 소후를 찾았다.

소후는 눈물을 흘리며 태왕에게 말했다.

“폐하, 정말 고맙습니다.”

“거룩한 부처님의 존전에서 어떻게 살생의 판결을 내리겠소? 난 이미 꺽감이 당신의 아이라는 걸 짐작하고 있었소. 그동안 속앓이하던 마음을 푸시고 이리로 오시오.”

 

우리말 어원연구

속앓이. 【S】soka(소카). 【E】agon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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