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배은경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장

봄에 땅을 갈고 씨를 뿌리고 비와 햇볕과 바람과 싸우며 애지중지 결실을 수확하기까지 농부의 애잔한 마음을 감히 짐작해보는 가을이다. 수확의 계절에 ‘우리 선조들은 어떤 농기구들을 썼더라’라는 생각이 든다. ‘(가래 초)’ 글자만 보면 참 복잡하게 생겼다 싶은데 예전부터 정이 가는 글자다.

<훈민정음해례(訓民正音解例)>에는 ‘가래(鍬)’라고 쓰고 <천일록(千一錄)>에는 ‘가내(可乃)’라 했으며 <해동농서(海東農書)>에는 ‘험()’이라 적었다. 모두 ‘가래’라고 부르는 신석기대부터 사용된 농기구의 이름이다. 농기구 하나에도 그 기능과 쓰임에 집중하여 의미를 담고 각각에 상세한 이름을 붙였다.

농사가 점점 발전하면서 우리나라에는 백여가지가 넘는 농기구들이 만들어졌고 지금까지도 전해지거나 사용되고 있다. 그 중 따비, 괭이, 쟁기 등과 더불어 논밭을 가는 연장 중 하나가 가래다. 소가 들어가지 못하는 무논에서 논을 갈거나 바닥을 고를 때 쓰였다. 옛말에 ‘가래질이 끝나면 농사준비 다했다’라고 할 만큼 가래질은 고된 작업이었다.

▲ 기산풍속화 ‘가래질하고’, <한국의 농기구>

전통적인 가래는 바닥과 손잡이를 하나로 만들고 바닥에 말발굽모양의 쇠 날을 끼운 모양이다. 가래 바닥 양쪽에는 구멍을 뚫어서 새끼줄을 매어 사용했다.

가래질은 셋, 다섯, 일곱 등 홀수의 사람들이 함께 작업해야 한다. 한사람이 가운데서 장부(손잡이)를 잡고 나머지 사람들은 반으로 나누어 양쪽에서 새끼줄을 당기게 된다.

세 사람이 하면 ‘세목한카래’, 일곱 사람이 하면 ‘일곱목한카래’라고 했다. 가래 둘을 잇대고 손잡이를 두 사람이 잡고 여덟 사람이 줄을 잡는 ‘열목카래’도 있었다고 하니 가래질은 사람이 여럿 모여야만 가능한 일이었다.

다른 나라에서는 볼 수 없는 우리나라 고유의 농기구이고 여럿이 함께 해야만 사용이 가능한 연장이라는 점이 더 마음에 끌린다. 무디고 힘없는 연장 하나로도 척박한 땅에서 가을걷이를 해낼 수 있었던 것은 우리 선조들이 가진 ‘함께’라는 힘의 결과였겠지.

배은경 울산발전연구원 문화재센터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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