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대리

때때로 미술관, 공연장 등지에서 예술과 대면할 때면 마음 한 구석이 저미어오는 것을 느낀다. 기쁨, 슬픔과 같은 감정의 방향이 아닌 무언가 따스한 것이 마음 속 깊은 구석을 쿡쿡 쑤신다. 그러곤 하염없이 작품에 빠져들곤 한다. 마치 맹독에 중독된 것처럼 몇 날 며칠을 그렇게 감정의 소용돌이 속에서 헤매다가 깨고 또 헤매기를 수백, 수천 번. 그 동안은 그 감정이 무엇인지 인지하지 못한 채 살아왔다. 과연 그 동안 느꼈던 알 수 없는 그것은 무엇이었던 것일까? 그 해답의 시작은 예술 작품의 창조자, 즉 예술가에게 있었다.

예술가로서의 삶은 고되다. 20대의 피아니스트가 일정 수준 이상의 스킬을 연마하는 것과 또 그 스킬을 60대까지 유지하는 것이나 고령의 작가가 1000페이지 이상의 장편소설을 써내는 것들은 결코 쉽지 않다. 아니 때로는 스스로에게 가혹하리만큼 엄격해야만 해낼 수 있는 인고의 행위이다. 모든 것이 이윤으로 통용되는 자본주의 시대에 생산 활동의 대가를 물질적 보상이 아닌 그것도 자기희생으로 이루어내는 직업은 예술가를 제외하곤 거의 없다. 그 자기희생의 끝에서 바로 예술은 탄생한다. 예술이 주는 직접적인 감정인 기쁨, 슬픔과 같은 것들이 아닌 그 내면에 존재하는 예술가의 희생과 인고의 흔적들이 우리를 진정 예술로의 ‘끌림’으로 초대한다.

결국 예술을 대할 때 얻게 되는 수많은 감정의 발로의 종착점은 예술가와의 교감인 것이다. 예술 작품은 그 소통을 위한 창(窓)의 역할을 수행하며, 이를 통해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들과 소통하게 된다.

때로는 예술가가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복잡하다거나 난해해서 소통에 어려움을 겪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자. 스스로가 감당할 수 있을 만큼 수용하고 또 공감하면 된다. 예술가도 인간이기에 모든 이들에게 효과적으로 그들의 메시지를 전달하진 못한다. 예술(예술가)과의 소통은 인간관계와도 같다. 어찌 모든 이들과 소통할 수 있단 말인가? 어쩌면 평생을 가도 수용하지 못할 예술들이 상당수일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쉽사리 포기할 필요도 없다. 삶을 이어가다 보면 우리는 수많은 어려움에 직면하고, 또 무수한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그런 고비가 닥쳐올 때면 그동안 지나쳐왔던 수많은 예술들 중 무언가가 우리의 곁으로 다가와 다정한 친구가 되어준다. 정말이지 정겹지 않을 수가 없다.

이처럼 우리는 예술을 통해 일상에서 경험하는 것과는 또 다른, 큰 위로를 얻게 된다. 예술로부터의 위로는 친구나 이웃, 가족들로부터 얻게 되는 것과는 달리 항상 변치 않는 절대성을 보여준다.

시간이 허락한다면 근처의 미술관이나 공연장을 방문해보자. 그리고선 예술과 마주하고 그 작품에 온 감각을 던져보자. 되도록 지식과 사상을 동원하지 않고 날 것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것이 좋다. 물론 모든 예술에서 무언가를 경험하긴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지속적으로 예술을 접하다보면 어느 시점 혹은 어느 작품에서 예술이 주는 따스함과 정겨움이 느껴질 때가 온다. 그 따스함과 정겨움은 단언컨대 우리가 일상에서 결코 경험해보지 못한 크나큰 감동으로 다가올 것이다. 예술, 그 심연의 세계에 함께하고 싶지 않은가!

서정민 울산문화재단 기획경영팀 대리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