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달 유네스코 등재됐지만

이예 선생의 활약상 포함

조선 초기 5회의 기록 빠져

역사·향토사학계 방안 강구

<학파실기>(울산박물관). 학성이씨 충숙공 이예에 관한 기록으로 1872년 후손 이장찬이 간행했다.

‘조선통신사 관련 기록물’이 지난달 31일 새벽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최종 등재된다고 발표됐다. 하지만 정작 ‘조선 최초의 통신사, 이예(1373~1445)’는 그 속에 포함되지않았다는 본보기사(2017년 11월1일 2면 보도)가 나간 이후 국내 역사학계와 울산지역 향토사학계가 대책 마련을 준비하는 등 깊어가는 고민을 드러내고 있다.

일본과 함께 공동등재를 추진한 부산문화재단은 조선통신사 세계유산의 범위가 1607년(선조40)부터 1811년(순조11) 사이 12회의 사행으로 한정된다고 밝혔다. ‘통신사’라는 이름으로 조선 임금이 파견한 조선 초기 5회의 사행 기록은 세계기록유산 범위에서 누락된 것이다. 부산문화재단은 이번 공동 등재를 위해 지난 10여년 간 함께 해 온 일본측 민간단체(일본 조선통신사 연지연락협의회)와의 회의 결과가 그렇게 도출됐다고 이유를 밝혔다.

“임란 이후 양국의 갈등을 봉합하고 평화를 유지하는데 통신사의 역할이 컸다는데 의미를 두었기 때문”이라는 부연설명이다.

하지만 조선 초기의 통신사 또한 양국의 화평을 위해 노력했다.

초기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의 명칭은 ‘보빙사’ ‘회례사’ ‘회례관’ ‘통신관’ ‘서장관’ 등 여러가지가 있었다. ‘통신사’란 명칭이 처음 쓰인 건 1413년(태종 13년) 박분(朴賁)을 정사(正史)로 한 사절단이었지만 중도에 정사가 병이 나서 그만 중단되고 말았다. 그후 교토(京都)에 있는 막부까지 다녀온 첫 통신사는 1429년(세종 10년)에 박서생을 정사로, 울산출신 이예를 부사로 파견한 사절단이었다.

역대 통신사의 파견은 양국 정세의 변화에 따라 능동적으로 목적을 달리했는데, 임란 이전에는 왜구의 소요 등에 대한 금지 요청이 위주였다. 강화와 포로의 생환, 일본국정을 탐색하는데도 주안점을 뒀다. 하지만 임란이 끝난 뒤인 1636년(인조 14년)부터는 달라진다. 막부 장군의 즉위를 축하하는 것이 주요 임무가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조선통신사 기록물’은 막부 장군에 대한 조선 임금의 축하사절단 성격이 강할 뿐 양국의 외교사적 가치나 의미를 두루 담아내지 못했다. 일각에서 통신사 기록물을 세계유산에 등재하면서 ‘우리 스스로 역사왜곡을 한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거센 비판이 나오는 이유다.

이에 따라 한일관계사학회와 지역 향토사가들은 신숙주(서장관)가 일본을 다녀온 뒤 기록한 <해동제국기>, 송희경(회례사)이 쓴 <노송당 일본행록>, 충숙공 이예(통신사)의 활동을 기록한 <학파실기>에 이르기까지 세계기록유산에서 배제된 조선 초기 대일 통신사 기록에 지역사회가 좀더 관심을 두어야 한다고 입을 모았다.

오랜 기간 이예 연구에 몰두했던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는 “조선 최초의 통신사, 이예의 이름을 딴 ‘이예로’ 개통 이후 이예에 대한 인지도가 점점 높아지고 있다. 이런 때 이예가 배제된 채 조선통신사 기록이 세계기록유산이 됐다. 동재 자체는 성과라고 할 수 있지만, 오류를 바로잡는 지난한 과제가 남은 것도 사실이다. 문화재청과 유네스코 한국위원회를 대상으로 지역사회가 이 문제를 해결할 방안을 전방위로 강구해야 한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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