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6)울산 폐사지-찬란했던 불교문화의 자취를 더듬으며

▲ 운흥사지 부도

신라처럼 천 년 동안 사직이 이어진 왕조는 세계적으로 드물다. 관점에 따라서는 로마제국을 그렇게 볼 수 있을 뿐이라고 한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고 긴 세월 동안 번창한 데는 호국불교 역할이 컸다. 그래서 신라사회를 논할 때 불교의 영향을 빼놓을 수가 없는 것이다. 특히 문화에 미친 영향은 더욱 두드러져 경주는 불교문화의 중심지로 각인되고 있다.

신라때 울산에 창건된 사찰 20여개
자장·원효·낭지 등의 고승도 활동
신라불교서 울산의 위상 높았음 입증

학술적 발굴조사로 유물 출토된 폐사
간월사·운흥사·영축사 등이 대표적
울산의 폐사지 둘러보니
찬란했던 모습 사라지고 허허로움만
황혼녘 인생길과 무관치 않아

신라 때 울산도 경주 못지않게 불교가 융성했다는 것이 문헌이나 문화재를 통해 어렵지 않게 확인된다. 신라의 국제무역항이었던 울산이 외국의 문물을 받아들이면서 불교문화를 꽃 피운 것은 지정학적으로 볼 때 당연한 일이리라.

▲ 성불암 석조

신라 때 울산에 창건된 사찰은 20여개로 알려져 있다. 그 중 태화사, 동축사, 망해사, 영축사, 축선사, 혁목사, 혁목암, 반고사가 삼국유사에 언급되어 있다. 이 절들과 관련하여 자장, 원효, 낭지, 연회 등의 고승들이 활동하였다고 하니 신라불교에서 울산의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알 수 있다.

삼국유사에 나오는 9개 사찰 중 위치를 정확히 아는 곳은 망해사와 영축사 뿐이다. 가장 먼저 생긴 절은 동축사로 진흥왕 때 세워졌다고 한다. 현존하는 동축사는 명칭은 이어졌지만 그 곳이 창건 당시의 위치인지는 확인할 수 없다.

▲ 영축사지

태화사는 선덕여왕 때 자장율사가 창건한 절이다. 자장이 당나라 유학을 마치고 귀국할 때 부처의 진신사리를 가지고 와서 황룡사 9층탑, 통도사 금강계단과 태화사 탑에 나누어 봉안했다고 하니 태화사의 위상을 짐작할 만하다. 1962년 태화동 반탕골에서 태화사지 십이지상 사리탑(보물 441호)이 발견되어 현재 울산박물관에 보관되고 있지만 절터는 확인되지 않고 있다.

원효가 주지로 있었던 대곡천변의 반고사는 천전리각석 건너편 산자락에 있었다고 추정되고 있지만 반구대 옆이라는 주장도 제기되고 있다. 영축산(현 문수산) 자락에 있었다는 혁목암은 낭지가 머물렀던 암자이고, 그 남쪽에 혁목사가 있었다고 하지만 절터의 위치는 미상이다. 압유사는 언양 지역에 있었으며 자장과 관련이 있다는 정도로만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기록은 없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 학성지, 울산읍지 등의 문헌이나 발굴 조사를 통해서 신라시대에 창건된 것으로 알려진 절들이 다수 있다. 문수사, 석남사, 운흥사, 청송사, 간월사, 신흥사, 내원암, 김신암, 백양사, 옥천암, 월봉사 등이 이에 해당된다. 이 중 다수는 절 이름을 계승하여 현재 운영 중에 있지만 창건 당시의 유물이나 기록이 남아 있는 곳은 별로 없다.

학술적인 발굴조사에 의해 금당과 건물 터가 확인되고 유물이 출토된 대표적인 폐사지는 간월사, 운흥사, 영축사이다. 이 들은 각각 울산광역시 기념물 제5호, 24호, 43호로 지정되어 있다.

▲ 운흥사지

운흥사지 답사를 별러오다가 가을 단풍이 한창인 날 길을 떠났다. 낙엽을 담은 맑은 계곡물과 울긋불긋한 단풍 숲이 조화를 이룬 비경 속에 운흥사지가 모습을 드러냈다. 들어가는 길이 좁고 험해서 뭐 그리 좋은 터가 있을까 했는데 동쪽이 확 트인 배산임수 명당 터를 보고 놀랐다. 정족산 동쪽 계곡에 있는 운흥사는 신라 진평왕 때 원효가 창건했다고 전해 오지만 원효는 진평왕 사후에 출가했으므로 기록을 믿기가 어렵다. 넓은 절터에는 돌무더기와 주인 잃은 수조 한 개가 덩그러니 놓여 있다. 처마 끝 풍경소리, 불국정토를 염원하던 예불소리와 범종소리가 가을바람에 실려오는 듯하여 서글퍼졌다.

▲ 간월사지 발굴 현장.

망해사, 영축사, 청송사와 간월사 절터는 한두 번씩 다녀온 곳이지만 울산을 대표하는 폐사지를 순례하는 셈치고 내친 김에 둘러보기로 했다.

처용설화가 얽힌 망해사를 찾았다. 신라 헌강왕이 동해 용왕을 위로하려고 개운포가 내려다보이는 영축산 기슭에 세웠다는 절이다. 쌍둥이처럼 닮은 승탑 2기(보물 제173호)가 천년을 넘는 세월동안 늠름하게 절터를 지키고 있는 자태가 아름답다. 가을바람이 승탑위로 낙엽을 흩뿌리며 갈 길을 재촉했다.

▲ 간월사지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

이어서 신문왕 3년(683년)에 창건되었다는 영축사 터로 갔다. 문수산 남쪽 기슭의 영축마을에 있는 이 절터는 2012년부터 울산박물관이 연차적으로 학술조사를 실시한 결과, 금당을 중심으로 삼층석탑이 동·서로 배치되어 있는 통일신라시대의 전형적인 쌍탑일금당(雙塔一金堂) 배치임이 확인되었다. 절터의 출입을 금하고 있어서 철책 너머로 바라보니 귀부와 석재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문수산과 남암산 사이의 동쪽 기슭에 있는 절골 마을에서 통일신라시대 양식의 삼층석탑을 만났다. 울산의 석탑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청송사지 삼층석탑(보물 제382호)이다.

석탑에서 남암산을 쳐다보니 신라 패망의 슬픔이 서려있는 김신암이란 암자가 생각났다. 남암산 서북쪽 중턱에 있는 성불암이 김신암터로 추정되고 있다. 전설에 따르면 경순왕의 둘째아들 범공(승명)이 형인 마의태자를 따라 출가한 후 이 암자에서 망국의 아픔을 달랬다고 한다. 마을 사람에게 길을 물어 어렵사리 암자에 도착했다. 스님도 나그네도 없는 작은 암자가 가슴을 울컥하게 했다. 산길에도 암자에도 새 소리조차 들리지 않고 사방이 쥐죽은 듯 적막했다. 왕자의 사무친 원한이 일순간 세월을 멈춰버리게 한 듯한 착각에 빠져들었다.

▲ 이선옥 수필가·전 울주명지초등 교장

순례의 종점은 진덕여왕 시절 자장율사가 지었다는 간월사 터다. 간월산 아래, 등억온천단지의 모텔들로 절터가 둘러싸여 있어서 심란하다. 금당지 등 절터의 대부분이 천막으로 덮여 있고 일반인은 절터를 밟을 수가 없다. 문화재청이 2019년까지 발굴과 정비사업을 실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울산지역 불상 중 유일하게 보물로 지정된 석조여래좌상(보물 제370호)과 부대시설들이 재배치될 모양이다. 새롭게 단장된 모습을 많은 사람들이 보게 되기를 기대해 본다.

폐사지를 둘러보았지만 찬란했던 옛 모습은 그려지지 않고 허허로움만 늙은 육신위로 내려앉는다. 황혼녘 인생길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아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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