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시대와 지향점이 저마다 달라도
인간은 성공을 갈구하며 내달려
스스로를 몰아세우는 그 목표는
진정한 자유의지서 비롯된 걸까?
    
끝없이 소진되는 경쟁이 버거워
삶의 목표 살필 여유를 앗기거나
가족과 소원해져 메말라갈 때면
상상의 질서에 갇혔는지 돌아보길

고등학생 아들이 밤늦게 야간 자율학습을 마치고 귀가한다. 하루 종일 꼼짝 없이 교실에서 지냈으니 지칠 만도 한데 웬걸, 이어폰을 귀에 꽂고 어깨춤을 추면서 들어온다. 완전 신났다. 휴대폰을 블루투스 스피커에 연결하니 빠르고 강한 리듬의 전자 악기 소리가 귀를 두들긴다. 일렉트로닉 댄스 뮤직(EDM)이란다. 매일 밤 잠시라도 아들의 힘을 북돋아준다니 고마운 일이지만 합성된 소리로 만들어진 음악은 내가 평소 즐기던 음악과는 전혀 다르다. 그러고 보니 어릴 적 할머니가 느린 시조를 즐겨 들으시던 모습이 떠오른다. 어른들은 왜 저렇게 지루한 음악을 들을까. 나도 훗날 아들과 전혀 다른 취향의 음악을 듣게 될까. 하고 생각했었다.

음악 취향이야 유행 따라 변한다 해도 삶의 목적과 가치는 다르지 않을까. 만일 삶의 목적마저도 흔들린다면 우리는 무엇에 의지해 살아갈까. 그러나 이스라엘의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Yuval Noah Harari)는 우리가 중요시하는 목적과 가치도 결국 상상의 질서에 불과하며 변한다고 말한다. 국내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된 그의 저서 <사피엔스>와 <호모 데우스>는 마치 관점의 전환을 ‘유발하라’는 특명을 수행하는 것 같다.

상상의 질서는 신화나 신념의 양상을 띤다. 동시대에는 너무도 당연하여 부동의 진리처럼 보이지만 세월이 지나 베일이 벗겨지면 기이한 모습이 드러난다. 십자군 원정에 따라나섰던 젊은이들은 자신들이 죽으면 영혼이 천국에 가서 영원한 기쁨을 누릴 거라 믿었다. 이들은 전쟁터에서 자신들과 똑같은 신념을 가진 상대를 만난다. 이슬람교도는 이교도의 구분만 달랐을 뿐 신과 예루살렘을 위해서 싸우면 죽어서 천국에 간다는 기본원칙은 같았다. 이러한 신념이 더욱 강고해지니 교회는 천국 입장권까지 판매하다가 지금으로부터 정확히 500년 전 수도자 루터의 반박을 계기로 상상의 질서는 무너지기 시작한다.

종교개혁 이후 종교의 영향력은 약화되고 그 자리에 개인과 인권을 중요시하는 인본주의가 들어섰다. 경제적으로는 자본주의 체제가 굳어졌다. 합리적 이성과 과학으로 기아, 역병, 전쟁은 대폭 감소하였다. 이제 우리는 자발적 의지로 사는 방식을 선택하여 능력을 한껏 발휘하고 돈을 벌어 만족스러운 삶을 살면 된다. 그런데 정말 우리의 자발적 의지가 맞는가? 십자군 원정대가 겉보기에 자발적으로 전쟁에 참여하였다면 우리의 선택은 과연 진정한 자유 의지에서 비롯된 것일까?

중견 회사원 A씨의 삶을 보자. 그는 두 자녀를 둔 성실한 직장인이다. 대도시에 거주하며 회사 업무에 열정적이다. 정규 업무 이후 모임과 회식에는 빠짐없이 참석해서 간부들이 원하는 것과 직원들의 분위기는 척하면 안다. 자녀들과는 자주 시간을 보내지 못하니 거리감이 있지만 그래도 괜찮은 사교육을 받도록 하니 좀 위안이 된다. 한때는 과로에 지쳐서 멈추고 싶을 때도 있었다. 그 때 눈에 확 띄는 카드회사 광고 문구를 보았다. “열심히 일한 당신, 떠나라.” 자신을 두고 하는 말 같다. 짧은 휴가 여행으로 재충전을 하니 일할 동기가 생겼다. 지금의 노력은 언젠가 훨씬 더 큰 보상을 받으리라는 확신도 생겼다. 무리해서 넓힌 아파트 대출금과 고급 자동차 할부금이 부담스럽지만 지금처럼 몇 년을 더 버티면 감당할 만하다. 승진도 빠른 편이다. 자신이 선택하고 노력해서 얻은 결과다. 가끔 자신의 위치를 입사 동기와 비교해보면 만족스럽다. 속으로 되뇌어 본다. 나 지금 잘 살고 있는 거지.

현대 사회의 성공 신화는 500년 전 천국 신화와 얼마나 다른가? 자본주의 사회에서 성공을 향한 노력과 경쟁은 끝이 없다. 신문 지면에는 경제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의 치열한 인생 역정이 소개된다. 드라마에는 권력자들의 화려한 삶이 등장하고 광고는 소비 욕구를 자극한다. 미디어와 광고는 욕망을 자극하여 우리의 목표가 진정 자신이 원하는 것인 양 착각하게 만든다.

이러한 상상의 질서 속에 사는 현대인들이 겪는 문제는 심각하다. 무진 애만 쓰다가 지쳐서 낙오된 대다수 사람들은 미디어에 실리지 않는다. 겨우 도달한 성공이 기대와 달라 허탈에 빠지기도 한다. 이미 충분히 성취했는데도 욕심이 지나쳐서 위험을 감수하다 나락으로 떨어지는 사람도 종종 본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 혼자 경쟁을 피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군축협상으로 경쟁의 수위를 낮출 가능성도 가까운 장래에 없어 보인다. 결국 끝없이 소진되는 경쟁에서 각자 조금씩 비껴서는 수밖에 없다. 약간의 힌트가 있다면 이런 것이다. 현재의 삶이 그 목표를 살필 여유를 빼앗거나, 가족을 멀어지게 하거나, 감정을 메마르게 하고 그 반동으로 자극적인 쾌락을 찾게 만들 때, 그리고 이러한 상황이 호전될 가망이 없어 보일 때 우리는 자신이 상상의 질서에 꼼짝없이 갇혀 있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아들은 오늘 밤도 일렉트로닉 음악을 들으며 하루의 피로를 날리고 있다. 무심히 지나치던 음악에 가만히 귀기울여본다. 소음처럼 들리던 시끄러운 소리에서 문득 질서 있게 배열된 아름다운 가락이 나의 상상을 끌어당긴다.

울산의대 울산대학교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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