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춘봉 기자 사회부 차장

피처럼 귀한 세금이라는 의미로 사용되는 ‘혈세(血稅)’라는 단어의 유래는 확실치 않다. 로마제국 시대가 기원이라는 설부터, 중세 유럽 오스만제국에서 시작됐다는 주장, 일본 메이지 시대에 생긴 단어라는 이야기까지 여러 설이 분분하다. 다만 각 설들은 징병 의무 즉 병역 의무를 혈세라고 표현했으며, 세금 대신 전쟁에서 피를 바친다는 의미를 담았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유래가 어찌 됐든 예나 지금이나 혈세는 국민의 희생을 바탕으로 한 소중한 세금을 뜻하기는 매한가지다.

매년 이 맘 때면 각 지자체는 행정사무감사로 부산하다. 행감은 의회가 행정기관이 혈세를 당초 계획에 따라 적재적소에 집행했는지, 행정 처리는 법과 절차에 따라 진행했는지를 꼼꼼하게 따지고 개선을 요구하는 과정이다.

제대로 된 행감이 이뤄지려면 감사권을 가진 의회에 대한 집행부의 정확한 정보 제공이 필수다. 사업을 직접 추진한 집행부는 각 사업의 문제점이 무엇인지 상세히 알고 있지만, 감시역을 맡는 의회는 이를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의회와 집행부 사이에 정보력의 비대칭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를 극복하기 위해 의회는 1년 동안 집행한 예산에 대한 방대한 자료를 집행부에 요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집행부가 제출하는 행감 자료가 부실하다는 지적은 매년 반복되고 있다. 올해 역시 예외는 아니다.

지난 23일 행감을 마친 울산 울주군의회는 앞서 지난달 열린 173회 임시회에서 2017년 행감 계획서를 채택하고, 집행부에 총 831건의 자료 제출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후 열린 행감에서 거의 모든 부서에 대해 자료 부실 지적이 잇따랐고, 일부 행감에서는 의원의 요구로 감사가 중지되는 사태까지 발생했다.

집행부가 제출한 감사 자료에 오기나 오타 등의 단순한 표기 실수뿐만 아니라 예산의 전체 총계가 소계보다 수백억원이 많게 기재되는 등 문제가 심각, 의원들이 자료 분석에 애를 먹는 경우가 빈번했다.

의원들은 “행감은 지난 1년간 추진한 업무를 한 번 더 되돌아보는 계기인데 집행부가 이를 가볍게 여기는 것 같다”거나 “자료에 대한 불신이 드는데 어떻게 제대로 된 감사를 할 수 있겠는가” 등의 질책을 쏟아냈다.

모든 자료를 쥐고 있는 집행부의 입장에서는 잘못이 드러날 만한 가능성이 있거나 민감한 사안에 대해서는 자료를 성실히 제출하기 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이는 행감을 일종의 전쟁으로 여기고, 의회의 공격에서 살아남기 위해 애쓰는 잘못된 인식에서 빚어지는 오류다.

행감은 행정의 공공성과 투명성을 높여 행정 발전을 꾀하는 절차로, 혈세 사용의 효율성을 제고하기 위해 의회와 집행부가 머리를 맞대는 과정일 뿐이다.

전쟁은 승패가 나뉘기 마련이지만 행감은 그렇지 않다. 의회가 집행부의 실정을 찾아내 질타하더라도 집행부가 패배했다고 여길 사람은 없다. 집행부는 행감의 결과를 겸허히 받아들이고 동일한 오류를 되풀이하지 않으면 된다. 또 행감 과정에서 특정 정책에 대해 의회와 집행부가 공감대를 형성하는 계기를 마련할 수도 있다.

행감에 대한 집행부의 인식이 전환될 필요가 있다. 행감은 잘못을 추궁하는 절차가 아닌 혈세의 누수를 막기 위한 중요한 과정이며, 행정 발전을 위한 도구이자 의회와 상생하는 또 하나의 방식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이런 관점에서 행감을 맞이하면 더 이상 제출 자료에 대한 부실 논란은 일지 않을 것이다. 행감은 전쟁이 아니다.

이춘봉 기자 사회부 차장 bong@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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