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9)믿음과 염원의 상징, 탑

▲ 청송사지 3층 석탑

스투파서 탑파→탑으로 변형
3세기경 석가모니 사리 봉안한
인도의 산치대탑에서 시작
중국 거치며 가옥 모양으로 만들어져

국내 4세기경부터 건립돼
목탑→전탑→석탑으로 발전
영축사지 석탑, 통일신라 대표적 탑

우리나라 탑의 대부분은 불탑이지만
풍수지리적 비보탑도 곳곳에 있어

최근 경주에서는 문화재와 관련한 사진전이 열렸다. 일제시기에 찍힌 사진으로, 당시 허물어져 있던 탑 주변을 발굴하는 장면이어서 관심을 끌었다. 길을 가다보면 벌판 한 가운데 홀로 서 있는 탑을 마주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통일신라 시절 나라의 중앙에 있어 중원경으로 불리던 충주에 건립해 국토의 중앙을 표시하던 탑평리 7층 석탑도 있고, 보름달이 뜨는 밤 남산을 기단삼아 달을 걸치고 우뚝 서 있는 경주 남산의 석탑에 올라 아래를 바라보면 이 세상은 마치 그 자체가 하나의 선계요 그림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사사성장 탑탑안행’(寺寺星張 塔塔雁行)

-삼국유사 중에서.

▲ 동축사 3층석탑

서라벌의 절은 하늘의 별처럼 많으며 탑은 기러기 떼가 줄지어 가는 것처럼 많다는 뜻이다. 중국역사서에는 신라 뿐 아니라 백제에 대해서도 사찰과 불탑이 많은 나라로 기록하고 있다. 이처럼 우리나라의 수많은 문화유산 중에서 아마도 그 구조물이 가장 많이 남아있어 아직도 쉽게 접할 수 있는 것 중에 하나가 바로 ‘탑’이 아닐까 한다.

인간은 높은 곳에 오르고자 하는 욕망과 하늘과의 소통을 위한 도구로서 높은 구조물을 만들고 돌로 탑을 쌓기도 하는 행위를 하지만 우리가 문화유산으로 언급하는 탑은 대체로 불탑을 말한다.

산스크리트어로 스투파라 부르며 그 것이 중국을 거쳐 들어오며 탑파로 음역돼 우리나라에서 탑으로 규정됐다고 한다.

불탑의 기원은 인도의 산치대탑에서부터 비롯됐다고 본다. 산치대탑은 기원전 3세기 경 석가모니가 입멸하며 남긴 뼈 조각인 사리를 봉안하여 봉분처럼 생긴 둥근 구조물을 만들고 난간을 두르며 그를 추모하는 구조물을 만들었는데 그 것이 탑의 시작이었던 것이다.

▲ 석남사 3층석탑

그 후 불교가 전래되면서 중국을 거치며 중층누각형식 즉 가옥의 모양으로 만들어지고 우리나라에서 그 형식이 대체로 고착되게 된다.

이후 불탑을 부처가 항상 존재하는 부처님의 무덤이라고 부르며 모든 불탑에는 사리공(孔)이라는 공간을 만들어 사리를 봉안하며 사리 외에 경전, 의복, 공예품 등을 넣는 경우도 있다.

불국사 석가탑에서 나온 세계 최초의 목판 인쇄물인 무구정광 대 다라니경 같은 중요한 유물들을 함께 봉안하기도 한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적어도 이러한 탑들이 수백 기 이상이 남아있으며 우리나라에 불교가 전래된 4세기 경부터 건립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탑의 재질로는 목탑으로 시작해 전탑, 석탑으로 발전했다는 것이 대체적인 견해이며 또한 각 나라별로 지리적 환경에 의해 많이 산출되는 재료로 건축되었다. 중국은 황화강 유역의 풍부한 진흙으로 인해 벽돌로 만든 전탑(塼塔), 일본은 목재의 풍부함으로 인해 목탑(木塔), 한국은 풍부한 화강암으로 인해 석탑(石塔)의 나라로 불리워지고 있다.

▲ 영축사지 석탑 부재들.

실지 중국은 목탑으로 보이지만 내부는 전탑인 경우가 많으며 일본에는 세계 최고(最古)의 목조 건물인 나라의 법륭사 5층 목탑이 남아 있다. 우리나라도 황룡사, 미륵사지, 사천왕사지 등 목탑이 많이 만들어졌을 것으로 보이나, 외세의 침입에 거의 불타고 대신 석가탑처럼 최고의 비례미를 보여주는 석탑의 전형이 자리 잡고 있다.

일찍이 신라의 외항으로서 역할을 했던 울산에도 수많은 탑이 만들어졌을 것이다.

인도의 법왕이라 불리는 아쇼카 왕 당시 장육존상을 만들기 위해 황금과 동을 배에 실어 보내 유일하게 불상을 완성했다는 울산 동축사 설화를 볼 때 울산은 당시 중요한 사찰들을 건립했었고 이와 함께 탑도 건축되었을 것이다.

원래 불당에서도 가장 중요한 것이 탑이었고 1세기를 전후하여 불상과 전각 등이 그 자리를 대신해 건립되기 시작하였으나 여전히 탑은 중요한 사찰의 중심이었다.

동축사, 석남사, 문수사 등 대다수의 사찰에는 불탑이 자리 잡고 있으며 특히 문수산 자락에 있었던 청송사의 청송사지 삼층석탑은 9세기 것으로 추정, 1960년대에 보물로 지정된 울산의 대표적인 탑이다. 무게를 받치는 기단부의 면석과 갑석이 한돌로 이루어진, 동시대 탑 중 구조상의 특징적인 부분이 있다.

국내 모든 탑의 전형이라 할 수 있는 석가탑은 해체수리 당시 토기, 수정구슬 등의 유물이 탑 속 사리공에서 발견됐다.

탑이 무너져 부재만 쌓여있었던 영축사지 석탑은 8세기 통일신라의 대표적인 탑으로 보인다. 신라 신문왕 당시 꿩이 사냥꾼을 피해 우물 속에서 새끼를 감싸고 있는 모습에 절을 지었다는 설화를 가지고 있다. 건립시기가 확실한 곳이라는 점에서 당시의 건축구조를 밝혀 줄 중요한 유적이다.

▲ 박혜정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

석남사에는 스리랑카의 스님이 가져온 불사리를 봉안했다고 하는 3층 석탑이 있으며 이외에도 많은 탑이 자리를 지키고 있다.

탑은 보통 사찰내부에 건립되어 탑돌이로 행해지는 예배의 대상이 되지만 때로는 예외도 있다.

일명 비보탑(裨補塔)이라 하는 것인데 이는 땅의 기운이 약할 때 기운을 보하기 위해 혹은 액운을 막기 위해, 혹은 적군이 자주 침입하는 길목에 세우기도 한다.

예를 들어 여주 신륵사 탑은 앞의 강의 범람을 방지하는 염원으로 세운 비보탑이라 할 수 있다.

뒤에 남겨놓은 자취가 앞에 놓인 길보다 더 중요할 수도 있다. 가장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라는 말처럼 이 땅에 남겨져있는 이러한 유산은 종교적인 의미를 넘어 우리에게 남겨진 역사적, 문화적 흔적이라는 점에서 우리가 보호해야 할 소중한 자산이 아닌가 한다. 박혜정 울산시 문화관광해설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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