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간 정은 점점 메말라가는 반면
공통분모 좇아 수많은 ‘쪼개기 모임’
사회갈등의 뿌리깊은 원인은 아닐까

▲ 윤범상 울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실용음악도

얼마 전 서울에서 지하철을 탔다. 경로석 앞에 서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앞자리에 앉은 70세는 족히 넘었을 어르신 한분이 누군가에게 큰소리로 전화를 한다. “00국민학교 출신 김00 인데 혹시 기억납니까?” 휴대폰 성능이 좋아선지 상대방 목소리가 나에게까지 들린다. “기억이 잘 안 나는데요.” “00국민학교 6학년 2반 하지 않았는가? 오랜만에 한번 모여 보려고 한명한명 전화를 걸고 있는 중이거든. 혹시 0월0일 저녁에 시간되나?” 소위 반창회(班窓會)를 주선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방은 잠시 뜸을 들이다가 “내가 나갈 형편이 안 되네. 미안허이.”라고 거절의 답변을 한다. 그는 힘없이 작별인사를 하곤 다시 다른 사람의 전화번호를 누른다. 그리곤 역시 비슷한 반응에 또 실망한다. 필사적으로 애원하고 실망하는 모습이 안타깝기 그지없다. 그러나 ‘이분은 출신학교를 진정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보다 조그마한 끈을 찾아서라도 모임을 이루려는 간절함이 훨씬 진하게 다가온다.

신문, 특히 지방지를 보면 모임광고가 자주 실린다. ‘00중학교동창회’, ‘재울(在蔚)00도(道)향우회’, ‘재울00군(郡)향우회’, ‘재울00장교동지회’… 광고지면의 크기, 임원진의 사회적 지위, 행사의 규모 등등에 있어 경쟁이 치열하다.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 없는 신문지면을 우린 매일 아침 본다. 잘 모르는 사이, 아니 일면식도 없는 사이지만 같은 군(郡)출신이라고, 같은 군(軍)출신이라고, 같은 학교출신이라고, 같은 성(姓)씨라고 해당모임에 자동으로 소속되게 된다. 물론 이러한 모임들은 소속감과 연대감 부여와 동시에 상부상조의 순기능도 있다. 회사동료나 친구, 취미모임과는 또 다른 준(準)공식적인 의미도 갖고, 정치적으로 힘을 가질 수도 있다.

여기까지는 그렇다 치자. 그러나 더욱 꾀죄죄한 공통분모를 찾아내어 소모임을 계속 분화해 만들어 간다면 궁극적으로 사회의 ‘뭉치기 구심력’보다는 ‘쪼개기 원심력’으로 작용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가 생기는 것도 사실이다. 아무리 작은 친목모임이라도 지켜야 할 회칙이 생기게 되고 그 모임내부에만 존재하는 특별한 상호인력(相互引力)의 족쇄(?)가 요구되기 때문이다.

내가 아는 한,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모임 만드는 걸 좋아하는 나라도 없는 것 같다. 특히 ‘뭉치기’보다 ‘쪼개기’ 모임을 만드는 데 더욱 그러해 보인다. 우리나라보다 100배는 넓은 미국에서, ‘재(在)워싱톤DC 아리조나향우회’라는 모임을 들어본 적 없으며, 한반도의 3배도 넘는 캘리포니아주에서 ‘재(在)샌프란시스코 샤스타향우회’ ‘Brown종친회’라는 말을 들어본 적 없다.

그 옛날 내가 다니던 대학의 기계공학과는 표면적으로는 필요에 의해서라지만, 사실은 교수들 사이의 인간적 거리가 원인이 되어, 기계공학과, 기계설계학과, 생산기계공학과의 3학과로 쪼개진 적도 있다. 몇 년 후 다시 합칠 때 어려웠던 것은 이루 말할 나위가 없다. 필자도 20년전 부(副)자 달린 직책을 맡은 적이 있었는데 누구의 제안에 힘입어 지역내 부(副)자 모임을 만들었고 모두 부(副)자와 아무 관계없는 지금도 그 모임은 계속되고 있다. 주위엔 ‘00띠’, 같은 부서 내 ‘0성씨’, ‘00은행거래자’ 등 기발한 소모임이 수없이 많다. 우리나라 사람들, 특히 남자들의 수많은 술자리도 따지고 보면 이러한 ‘쪼개기 모임’의 부산물이다.

그렇지 않아도 동서(東西)로 찢어지고, 이념으로 찢어지고, 세대로 찢어지고, 계층으로 찢어지고, 노사(勞使)로 찢어지고 최근엔 노노(勞勞)로까지 찢어져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학연, 지연, 혈연의 ‘쪼개기·뭉치기’는 하도 뿌리가 깊어 변화의 기대는 난망하다. 그러나 진정 보잘 것 없는 공통의 자투리를 찾고 찾아 모임을 더욱 세분화하는 관습이야말로 사회갈등이라는 뿌리 깊은 우리문제의 근본 원인은 아닐까하는 생각을 해본다. 아파트 옆집 사람과는 인사도 안하면서….

윤범상 울산대 조선해양공학과 명예교수 실용음악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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