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0)심수구

▲ 심수구씨는 울산에서 태어나 울산에서 미술활동을 했지만 그의 명성과 작품세계는 울산을 뛰어넘었다. 사진은 고인이 가장 활발한 미술 활동을 했던 1993년 그린 유화 ‘도시의 풍경’이다. 이 그림은 현재 울산의 박민철씨가 소장하고 있다.

울산 출신으로 어릴적부터 미술에 두각
중학생시절엔 부산 동아국제미전 입상
고교땐 도내 미술대회 휩쓸어 유명해져
2000년대부터 본격 해외전 국제적 명성
활발한 작품활동과 달리 은둔생활 즐겨
삼남면 작업실서 교류없이 지내다 영면

심수구 작가가 지난달 20일 타계했다. 고인은 세상을 떠나면서 자신의 죽음을 외부에 알리지 말라는 유언을 남겼다. 장례식도 영정사진도 없이 형제만 불러 단출하게 치룬 후 화장을 해달라고 요청했다.

이 때문에 고인의 죽음은 그가 세상을 떠난 일주일 뒤 언론의 보도로 알려졌다.

생전 은둔생활을 즐겼던 고인은 죽음마저도 이처럼 조용히 정리했다. 그는 조용히 갔지만 남은 사람들은 그렇지 않다. 고인을 아꼈던 울산미술협회 회원들은 그의 타계 소식에 당혹감을 감추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고인이 울산 미술사에 남긴 족적을 볼 때 장례식만이라도 울산미술협회장으로 해야만 했다”면서 아쉬워한다.

하지만 고인의 평소 성격을 보면 그가 타계한 후 이런 글마저 남기를 좋아하지 않을 것 같다. 그는 남다른 줄거리 있는 삶을 살았고 그의 행적 자체가 울산미술사였다. 그가 좋아하지 않더라도 이런 글을 남겨야 하는 것은 이 때문이다.

▲ 故 심수구 화백

고인은 울산 출신으로 울산에서 작품 생활을 했지만 그의 명성과 작품 세계는 울산을 넘어섰다. 말년에는 해외에서 전시회를 자주 가져 해외에서도 명성이 높았다. 타계 할 무렵 해외 전시 일정이 많이 잡혀 있었지만 건강상 이를 모두 열지 못하고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고 한다.

고인의 작품이 해외에서도 얼마나 호평을 받았나 하는 것은 2015년 스페인 마드리드 전에서 알 수 있다. 고인을 잘 아는 사람들은 고인이 마드리드로 갈 때 많은 작품을 가져갔지만 작품이 모두 팔려 돌아올 때는 이들 중 한 점도 가져오지 않고 돈 가방만 들고 왔다고 말한다.

1949년 울산군 대현동에서 태어났던 고인은 어릴 때부터 그림에 취미가 있었다. 제일중·울산고 동기동창으로 그를 항상 가까이서 지켜보았던 김종경 시인(69)은 “고인이 어린 시절부터 명상을 좋아했고 풍부한 독서량이 그의 미술세계를 넓힌 자양분이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인의 부친은 대현면에서 큰 과수원을 갖고 있었다. 이 때 고인의 집을 가끔 방문했던 김 시인은 고인의 집에 책이 많아 놀랐다고 말한다. 실제로 당시 고인의 과수원에서 일했던 C모씨는 고인의 집에 있던 장서를 모두 읽어 나중에 유명한 소설가가 되었다.

제일중학교 때 고인은 미술 특활반에 들어가 활동했다. 중학시절을 함께 했던 오태룡(69)씨는 “우리가 중학교를 다닐 때만 해도 많은 학생들이 크레용을 살 돈이 없어 미술시간만 되면 선생님의 눈치를 보아야 했는데 그 때 이미 이젤과 화구를 들고 특활반에서 미술공부를 하는 수구는 우리들의 로망이었다”고 말한다.

고인은 중학 시절부터 이미 미술학도로서 두각을 나타내어 1963년 14살의 나이로 부산 동아대학교에서 열린 동아국제미전에서 입상해 주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고교 시절에는 명성을 더 떨쳤다. 고등학교에서는 서라벌 예대를 졸업했던 차일환 미술선생의 지도를 받았다. 당시 울산고등학교에는 대외적으로 학교 명성을 높였던 학생이 화가 심수구, 시인 김종경, 음악가 김창근 등 3명이 있었다. 이들은 당시 경남도내에 열리는 예술제에 참석해 각 분야에서 좋은 성적을 올려 학교의 명성을 높였다. 이들 중에도 고인은 특히 미술부문에서 도내 미술대전을 휩쓸었다.

김종경 시인이 고교 3학년 때 고인과 함께 진주 개천예술제에 참석한 적이 있다. 그때 문학 백일장은 비봉루에서, 미술대회는 촉석루에서 개최되었다. 비봉루에서 백일장을 끝낸 김 시인이 촉석루에서 그림을 그리고 있는 고인을 찾아갔다. “제가 촉석루에 막 도착했을 때 수구가 ‘오늘은 좋은 화상이 떠오르지 않는다’면서 그때까지 그린 그림을 찢어 버리려고 하더니 마감시간이 되어서야 하는 수 없이 제출해 나는 수구가 이번 대회에는 입상하기가 힘들겠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다음날 발표를 보니 미술부문에서는 수구가 일등을 해 놀란 적이 있습니다.”

대학은 서울로 가 동국대학 서양학과를 졸업한 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원 회화과에서 수업했다.

서울에서 미술 공부를 마친 후 고향 울산으로 다시 온 그는 성안, 척과, 정자에 작업실을 마련하고 그림을 그렸다. 이때도 그림은 울산에서 그렸지만 전시회는 서울과 대구, 마산 등 타지에서 많이 했다.

20대인 1970년대만 해도 1973년 샌프란시스코 세계 판화전,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서울국립현대미술관에서 개최된 앙데팡당전에 작품을 전시했다. 80년대는 1981년 부산청년비엔날레· 한국수채화 협회 대만전, 1986년 붓다대학 청년시각전, 1987년 윤 화랑 개관기념전에도 참여했다.

공모전 수상만 해도1973년 서울 명동화랑에서 개최된 현대판화 그링프리전에서 동상을, 1973년 서울 한국미술협회 판화앙데팡당전에서 우수상을 수상했다.

2000년대부터는 해외전시회를 자주 가졌다. 2004년에는 스페인, 미국, 독일, 호주, 중국에서, 2005년에는 스페인 고메즈갤러리, 2006년에도 이탈리아, 스페인, 미국, 호주에서 전시회를 열었다.

고인은 울산에 윤 화랑이 개관될 때 특히 기뻐했다. 윤 화랑이 문을 열 때만 해도 울산에는 제대로 된 화랑이 없어 화가들이 작품 전시에 어려움을 겪어야 했다. 그는 시간이 있을 때마다 윤 화랑을 방문, 윤명희 이사장과 함께 화랑의 성공적인 운영방법을 의논했다. 2006년에는 제5회 윤 화랑 지원금 수상자가 되기도 했다.

옥교동에 있던 ‘WW갤러리’의 이름을 개명했던 사람도 고인이다. ‘WW갤러리’는 고인이 개명을 하기 전까지만 해도 갤러리 이름이 갤러리 주인 강정길의 호인 ‘취산’이었다. 그런데 어느 날 갤러리를 방문했던 고인이 강씨에게 “세상은 변하는데 왜 갤러리 주인의 미술에 대한 안목은 바뀌지 않느냐”면서 “‘취산’이 너무 고리타분한 냄새가 나니 현대적 감각이 살아있는 WW로 바꾸라”고 해 간판을 바꾸어 달았다.

이 무렵 그의 작품에 대해 호남대 윤진섭 교수는 ‘심수구의 작품세계를 특징짓는 개념은 평면과 부피의 문제이다. 그가 본격적으로 작품 활동을 시작하던 1970년대 초반부터 관심을 기울여온 회화 상의 화두가 평면과 부피다. 이 이율배반적인 명제를 회화적으로 어떻게 풀어갈 것인가 하는 점에 몰두했던 화가가 심수구다’라고 표현하고 있다.

울산에서 작품 활동을 하면서 자주 찾은 곳이 성남동 공간미술관이었다. 그는 울산의 외곽에 살면서 공간미술관으로 올 때는 항상 트럭을 타고 나왔다. 작가로 고인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했던 때가 80~90년대였다.

이무렵 고인이 가장 친하게 지냈던 인물이 홍수진이었다. 울산사람들에게는 ‘홍박’으로 더 잘 알려진 홍씨는 이 무렵 울산 MBC PD로 활동하고 있었다. 고인에게 부인을 처음으로 소개한 후 중매를 썼던 사람도 ‘홍박’의 부인이었다.

고인은 이처럼 활발하게 활동했지만 은둔생활을 즐겨 개인생활은 비밀에 싸여 있었다. 성격적으로 ‘홍박’과 그는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홍박’ 역시 70~80년대 울산에서 가장 활발하게 문화 활동을 했지만 성격적으로는 항상 음울해 ‘사계절 추운 사나이’라는 별명을 갖고 있었다.

90년대 고인의 모습을 잘 보여주는 시가 있다. 김종경 시인이 쓴 ‘적소(謫所)-수구(秀求)에게’라는 제목의 이 시는 다음과 같이 그를 표현해 놓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바람은 그렇게 수상한 눈치만 보이고 있다/소문 없이 남아 있는 서천 무논가에 앉아/들풀이란 들풀은 모두 불러내고 있다/그대의 가슴에 질퍽하게 사랑은 /사랑으로만 남아 울고 있다가 /세상사 다 잊을 만하면 /문득 인적 드문 마을에 몸을 숨긴다/정말 본심을 드러냄 없이/남북 강산에 낮은 키로만 깨달아 온 우리/동네 하늘밑 떠도는 사소함만 털고 있느니/이 땅의 제몫만 나눠 갖고 떠날 일만 생각하느니’

김 시인은 이 시에 대해 “적소는 ‘유배지’의 다른 명칭이다. 우리는 어쩌면 적소에서 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은둔과 고독을 즐긴 심수구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고 말한다.

고인이 울산에서 가장 활발하게 미술활동을 했던 때가 정자에 작업실을 두었을 때다. 바닷가 4층 건물에 화실을 만들어 놓고 좋아하는 음악을 들으면서 고인은 열심히 이곳에서 작품 활동을 했다.

이후 그가 옮겨간 곳이 삼남면 이었다. 이때부터는 건강이 좋지 않았던지 그의 작업실을 방문했던 지인들은 없다. 고인의 죽음은 그를 전설의 인물로 만들었다. 그러나 고인을 보내면서 그를 아꼈던 사람들은 당분간 울산에서 고인처럼 미술을 사랑하고 국제적 명성을 가진 인물이 배출되기가 어렵다는 아쉬움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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