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느 일상 - 박영숙作 오래 머물렀던 평범한 공간 속에서 또다른 무언가를 갈구한다. 너무나 익숙했던 일상(日常)이 어느날 갑자기 낯설어진다. 추억이 미래가 된다. 일탈은 에너지다.

다방이 신기루같이 사라져버리듯
7080청춘들도 ‘명퇴’란 이름으로
직장을 떠나고 있다.
내 젊음의 순례지 음악다방
알딸딸하고 그리운 추억이여 안녕

‘그다방에 들어설 때에 내 가슴은 뛰고 있었지. 기다리는 그 순간만은 꿈결처럼 감미로웠다. 약속시간 흘러갔어도 그 사람은 보이지 않고, 싸늘하게 식은 찻잔에 슬픔처럼 어리는 고독….’ 나훈아가 부른 찻집의 고독이다.

한동안 팬들의 시야에서 사라졌던 그가 최근 혜성처럼 무대에 등장했다. 지난해 말 서울 등 3개 도시에서의 공연 티켓이 인터넷 판매 단 몇 분 만에 매진 사례를 기록하더니 최근 울산, 부산 등지에서의 공연도 매진이다. 한마디로 대박이다.

그가 부른 ‘찻집의 고독’은 끼니를 거르는 한이 있어도 다방 출근 눈도장만큼은 꼭 찍었던 7080세대들에게 ‘청춘교가’ 같은 노래다. 다방이 성업했던 시기는 음악다방이 잘 나갔던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 전부를 아우르는 그 시대가 아닐까 싶다.

이 시기는 1960년대 시작됐던 대한민국 경제개발 5개년 계획들이 성공하면서 국가적으로는 국민들이 먹고사는 문제가 해결되는 때와 맞물린다.

‘새벽 종이 울렸네, 새 아침이 밝았네.…’

이 노래가 새벽을 여는 청소차량 음악으로 등장하던 시절, 대한민국은 시골청년들이‘잘살아보세’를 외치며 도시로 몰려들었다. 도시에 온 청춘들이 다방으로 몰려들면서 다방은 도심문화의 구심점 역할을 했다.

울산은 원 도심 시계탑을 중심으로 건물 하나 건너마다 다방이 생겨났을 정도로 울산시내는 음악다방을 비롯해 계층별 다방이 붐을 이루었다. 거리 전봇대마다 숙식제공이 기본인 다방 ‘레지(종업원)’ 구인광고가 도배를 했고 레지들의 몸값도 천정부지로 뛰었다. 영업력 있는 레지는 대기업 근로자 월급 두 배는 거뜬히 받았다.

1970년대 말 나는 현대자동차 울산공장에서 근무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 오후 5시 까지가 정상근무였다. 현대차 정문 앞에도 신호등 건너 2층 ‘문화다방’을 비롯해 건물마다 다방들이 있었고 밤이면 다방 간판들이 보석처럼 빛났다. 이들 다방은 퇴근 이후나 주말은 합석해야 할 만큼 붐볐다. 시내 ‘청자다방’ 등 유명 다방들은 대기번호표까지 나눠주었다. 나는 날이 갈수록 음악다방 순례자가 되어갔다. DJ가 되는 꿈을 꾸면서 대중음악에 빠져든 시기였다. 오죽했으면 친구들이 ‘딴따라’라고 놀렸을까.

음악다방으로 최고의 사랑을 받았던 청자다방은 방송국 공개홀로서 유명세를 탔다. 월성·목심·맥심·소공동·예나르(신화)·황금다방 등도 시계탑을 중심으로 소방도로를 사이에 두고 옹기종기 자리를 잡았다.

이때는 다방 DJ들이 지금의 아이돌 만큼 팬들의 사랑을 받았다. DJ들은 한마디로 대중들의 우상이었다. 그들이 다방을 옮겨가면 자연스레 단골들도 함께 옮겨갔다. 다방 주인들은 단골손님을 놓칠세라 선금에 웃돈을 얹어주고 DJ들을 황제처럼 모셨다.

그 시절의 지인들을 만나면 “요즘도 다방에 가느냐”고 묻는다. 실없는 소리다. “다방이 있어야 가지.” 그냥 속으로 웃고 말지만 정작 가슴은 뜨거워진다. 잊지 못할 알딸딸한 추억임에는 틀림이 없다.

엊그제 원도심 문화의 거리를 걸었다. 시계탑 사거리에서 시립미술관 공사장 방향으로 가는 길, 구 상업은행 앞 2층 가로수 다방 터가 보였다. 한때는 저곳에서 수많은 예술인들이 작품전시를 하느라 북적였다.

다방이 유일한 작품전시공간이던 시절, 다방에 가면 점잖은 노신사가 파이프 담배를 피우던 모습들이 흔했다. 멜빵바지를 입고 다방 한 코너에 앉아있었던 울산 예술가들은 최근 뜻 있는 후배들에 의해 ‘별이 된 사람들’로 다시 기억될 준비를 하고 있다.

세월은 잠시도 멈추지 않는다. 그때로부터 40년의 세월이 강물처럼 무심히 흘렀고 까맸던 머리숱에 허옇게 된서리가 내렸다. ‘레지 구함’ 구인광고가 붙었던 전봇대가 지하로 사라지면서 원도심이 깨끗해졌다. 그러나 깨끗해지면 깨끗해질수록 추억은 사라져 간다. 껌 딱지 같은 그리운 추억들이 사라지면서 이미 그곳에는 따뜻함도 사라져버렸다.

구 상업은행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가까운 다방을 찾았지만 없다. 커피 세 개, 프리마 세 개, 설탕 세 개, 333 다방커피가 오늘은 간절하다. 그 시절을 추억하려면 다방이라는 소품으로 무대가 만들어져야 한다. 그러나 근래 다방 간판을 구경하기조차 쉽지 않다.

다방이 사막의 신기루같이 사라져버리듯 7080 청춘들도 ‘명퇴’라는 이름으로, 정년퇴직이라는 이름으로 직장을 떠나고 있다. 2~3년 후면 이들 모두 직장에서는 얼굴을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기억의 저편에는 아직도 장발의 DJ가 세무가죽으로 LP판의 먼지를 닦았던 뮤직 박스가 눈에 삼삼하다. 그 시절은 이제 그들 모두에게도 알딸딸하고 그리운 추억일 뿐이다. 허공을 향해 손을 크게 흔들었다. 다방이여 안녕!

▲ 정은영씨

■ 정은영씨는
·계명대학교 대학원 졸, 행정학 박사
·전 경상일보·경남신문 기자
·전 울산수필가협회 회장
·울산예총 사무처장 역임
·<다방열전> 외 다수
 

 

 

 

▲ 박영숙씨

■ 박영숙씨는
·울산대학교 미술대학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7회(부산·울산·서울·LA)
·단체전 150여회
·울산미술대전 초대작가
·울산미협·울산현대미술작가회 회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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