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3)권 제독과 ‘사이공강에 지는 노을’

▲ 해군 교육관 시절의 권정식 전 제독.

1937년 울산 태화동서 태어나
울산초-제일중-울산농고-해사 거쳐
월남전에 의전관겸 행정장교로 참전
고교때 백일장서 장원했던 문학도로
일기 통해 월남의 생생한 현실 기록
손영길 장군과의 만남도 일기에 남겨
해군 장교로 있으면서
이후락 실장·손 장군과 인연 맺어
책 후기에 故김호경 중위 이야기도

울산 출신의 권정식 전 제독이 월남참전기 <사이공에 지는 노을>을 출간했다. 권 전 제독은 1937년 울산 태화동에서 태어났다. 울산초등(41회), 울산제일중(3회), 울산농고(16회)를 거친 권 전 제독이 해군사관학교에 입학한 때가 1957년이다.

당시 울산농고는 실업계가 되어 대학 진학이 어려웠는데 그가 해사로 진학 할 수 있었던 이면에는 이후락과 손영길 등 울산농고 선배들의 격려가 큰 작용을 했다.

고3 시절 그가 학생회장으로 있을 때 이후락씨는 주미 한국대사관 무관실장으로 있었다. 그런데 이 무렵 이 실장이 고교 후배들에게 격려사를 보내 학생회장이었던 그가 전 학생들 앞에서 격려사를 낭독했다. 격려사에는 ‘세상이 넓으니 후배들이 우물 안 개구리 생각에서 벗어나 미국처럼 넓은 땅에서 활동할 야망을 가져라’라고 쓰여 있었다.

권 전 제독은 “제가 연단에서 이 격려사를 읽을 때만 해도 당시 저를 포함한 학생들 대부분이 미국은 고사하고 서울도 가보지 못해 미국이 도대체 어디에 있는지 궁금해 했습니다”고 회상한다.

그가 졸업을 앞두고 있을 때 손영길 장군도 학교로 와 학생들에게 육군사관학교로 진학하면 돈들이지 않고 국비로 공부를 할 수 있다면서 후배들을 격려했다. 그러나 권 전 제독은 그 때 이미 자신이 해사에 우수한 성적으로 합격해 육사로 갈 생각을 하지 않았다고 말한다.

고교시절 이미 이 실장, 손 장군과 간접적으로 인연을 맺었던 그는 해군 장교로 있을 때 이들 둘 모두를 직접 만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실장은 진해 대통령 별장에서 만났다. 권 전 제독은 대위시절 진해 대통령 별장을 관리했는데 이 때 박정희 대통령을 수행해 별장에 온 이 실장을 만나 고교 선후배로 고향 얘기를 나누었다.

권 전 제독은 이날 이 실장이 자신에게 “장교가 되었으면 왜 나를 한번 찾아오지 않았느냐”고 말할 때 “‘선배님이 너무 높은 사람이 되어 감히 찾아 갈 생각을 못했다’고 말하자 이 실장이 크게 웃었다”고 회상한다.

이후 권 전 제독은 이 실장이 권좌에서 물러나 이천에서 칩거 생활을 하고 있을 때도 만났다. “제가 이천에 갔을 때 선배님이 도자기에 심취해 있었는데 저에게 방문 기념으로 직접 구운 수반을 한 개 주어 이것을 지금도 가보로 집에 보관하고 있습니다”고 말한다.

권 제독이 손 장군을 직접 만난 것은 월남 전선에서다. 권 전 제독은 해사 졸업 후 구축함 함장, 한미연합사령부 인사부장, 제3해역사령관, 해군교육사령관, 해군대학 총장을 역임한 후 소장으로 예편했다.

▲ 그가 최근 출간한 월남 참전기 <사이공강에 지는 노을>.

<사이공에 지는 노을>은 그가 50년여년 전 월남에서 활동할 때 적어 놓았던 일기를 책자로 발간한 것이다. 권 전 제독은 1969년 1월부터 다음해 2월까지 13개월 동안 해군 대위로 백구부대에서 의전관 겸 행정장교로 참전했다.

의전관이다보니 직접 전선에 투입되지는 않았지만 주월사령부의 명에 따라 지휘관과 함께 월남전선 전역을 누벼 당시 전황에 대해서는 누구보다 정확히 알고 있었다.

이 책은 전선의 일기가 바탕이지만 문장 속에는 월남전의 아픔과 망해가는 월남을 지켜보는 한 군인의 눈물겨운 기록이 있다.

권 전 제독은 고교 시절 학성공원 백일장에서 장원을 했던 문학도다. 따라서 글 속에는 문학도의 서정이 곁들여 있다. 월남으로 갈 때 부인은 돌이 안 된 아들과 셋방살이를 하고 있었고 어머니에게는 참전 사실을 숨겼다.

월남을 향해 출국하는 날의 심정은 다음과 같이 그려져 있다.(1월9일)

‘역사의 방관자가 아닌 역사의 동반자가 되기 위해 도도한 물결 속에 내 작은 몸뚱이를 던졌다. 부산항 제3부두, 전쟁터로 떠나는 우리들이나 부두에 남은 저들의 마음이 하나 되어 뜨거운 감정이 북받치는 순간이었다. 떠나는 장병들 중 돌아오지 못할 누군가가 있다는 냉엄한 현실이 저들과 우리들을 슬프게 하고 있다. 사랑하는 아들이 무서운 남방 전쟁터로 떠난다는 소식을 들으셨으면 어머님께서는 혼절 하셨을 것이다. 그래서 내 월남 출전 사실을 어머님께는 비밀에 붙인 채 아들 첫돌을 일주일 남겨두고 월남 전선으로 향하는 함정에 올랐다. 신혼의 이별, 그것도 남편을 전쟁터로 보내는 마음이 어떠했을까. 그렇게 부산항을 떠났다.’

전쟁 중에도 끝없이 데모를 벌이는 월남인들 때문에 망해가는 월남을 가슴 아프게 지켜보는 글도 두 번이나 기록해 놓고 있다. 불행히도 권 전 제독의 예견은 적중했다.

‘막강한 정보력과 최신 무기를 완비한 미군이 월남전에서 쩔쩔매고 있는 현실이 참으로 이해하기 힘들다. 무기만으로 승부를 가린다면 로마가 왜 망했겠는가. 체제 수호를 하겠다는 의지가 있어야 한다. 매일처럼 벌어지고 있는 사이공 시내 반체제 인사들의 시위는 신무기보다 더 위험하다고 해야 할 것이다.’(5월 11일)

‘독립궁을 지나다보니 반정부 시위대 승려들이 더위에 지쳤는지 모두가 길거리 가로수 그늘에서 들어 누워 맥 빠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결국은 저런 내부 적들이 월남을 패망으로 이끌 것이다.’(11월 5일)

맹호부대를 방문해 손영길 장군을 만났던 날도 일기에 남아 있다.

‘맹호부대 고별방문, 사단장 윤필용 장군이 참모들을 도열시킨 가운데 간단한 사열을 받았다. 도열한 참모 중에는 손영길 작전참모도 계셨다. 사관생도 때부터 친동생처럼 나를 사랑해 주시는 형님이시다. 형님께서 작전참모실로 나를 데리고 갔다. 책상 위에 있는 박정희 대통령 일가와 함께 찍은 사진이 형님에 대한 박 대통령의 신뢰가 얼마나 두터운가를 보여준다. 헤어질 때는 용돈으로 거금을 주셨다.’(5월24일)

11월20일에는 ‘맹호부대 작전참모 손영길 형님께서 대령으로 진급해 귀국한다는 소식이 전해 왔다’는 글도 써 놓았다.

이런 인연으로 1973년 소위 말하는 ‘윤필용 사건’으로 손 장군이 안양교도소에 수감되었을 때 권 전 제독이 면회를 가려고 했다. 그런데 연락을 했더니 손 장군이 “지금은 내가 쿠데타 음모사건으로 조사를 받고 있으니 권 제독이 나를 면회 오면 같은 통속으로 보아 군 생활에 지장이 많을 수 있다”고 말해 면회를 포기했다.

‘후기’에는 귀국 후 동작동 월남전 전사자 묘지에 들려 고 김호경 중위의 묘역을 둘러본 내용도 사진과 함께 싣고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고향 중학교 4년 후배인 김호경 중위 묘 앞에 섰다. 고향신문 경상일보가 고 김 중위 전사 사실을 3회분 특집으로 남겼는데 내용은 다음과 같다. 1967년 2월12일은 음력 설날이다. 전사통지서를 배달해야하는 집배원은 차마 설날에 슬픈 소식을 전할 수 없어 그 다음날에야 죄지은 표정으로 전사통지서를 내밀었다. 그 시간 김 중위 어머님은 절에서 아들의 무사귀환을 부처님에게 빌고 있었단다. 육군사관학교를 21기로 졸업한 김 중위는 그 다음해 월남 출전 명령을 받았다. 가족들은 이틀에 한번 오는 우체부를 기다리는 것이 일과였는데 그 우체부가 전사통지서를 배달 해 올 줄이야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었다. 그 때 꽃다운 젊음. 누가 기억하고 있을 것인가. 산자의 처절한 아픔은 더욱 기가 막힌다. 미망인과 그 부모 형제들은 50년 세월동안 국가로부터 철저한 외면당한 채 목숨을 이어왔다.’

이 책은 조국의 이름으로 뽑혀 월남으로 갔던 많은 장병들의 희생을 다시 상기할 수 있는 기회를 준다.

국군이 월남에 파병된 것은 1964년 7월부터 1973년 3월까지 8년8개월이다. 이 동안 울산에서도 4500여명이 참전해 많은 장병들이 김 중위처럼 전사를 하기도 하고 부상을 입었다.

지난주에는 3·1절 기념식을 맞아 참전 용사들이 울산대공원에 있는 현충탑에서 참배를 올렸다. 월남참전 용사들은 현충탑이 건립된 후 매달 1일 참배를 올리고 있다.

십자성부대 소속으로 참전했던 김기석(74) 대한민국월남참전자회 울산광역시 중구지회장은 3·1절 기념행사에서 “월남전이 우리 경제와 국방에 끼친 영향이 크고 우리나라 장병들의 희생이 엄청났는데도 요즘은 유족들을 제외하고는 월남전 자체를 기억하는 사람들이 거의 없어 호국 행사를 전우들끼리 하고 있는 형편”이라면서 “북의 핵폭탄 개발로 요즘처럼 나라가 위급한 때 다시 한 번 우리 장병들의 월남참전 의미를 되새겨 보면서 그들의 호국사상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고 강조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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