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직적인 조직체계 쉬쉬 분위기
솜방망이 처벌·2차 피해 이중고
수평적 조직문화정착 노력 필요

▲ 이호진 세민병원 부원장

요즘 들어 최대 이슈 중의 하나인 ‘미투(Me-Too)’ 운동으로 사회 전반적으로 쉬쉬해왔던 조직내 성폭력문제가 수면 위로 떠올랐다. 법조계를 시작으로 대기업, 영화계, 문학계, 항공사 등에 이르기까지 여러 사회 영역에서 성폭력 피해를 입은 이들이 ‘나도 당했다’며 성폭력 사건을 고발하고 있는 것이다. 의료계 역시 예외는 아니지만 다른 조직이나 집단에서 연이어 제기되는 미투 고발사례에 비하면 조용한 편이다. 사실 의료계는 미투 운동이 확산되기 이전에 여러 차례 고질적인 성폭력 문제가 언론을 통해 보도되면서 사회적 논란을 불러왔었다.

2011년에는 모 대학 의대에서 집단 성추행 사건이 벌어졌고, 2016년에도 한 대학의 의대에서 집단 성희롱 사건이 벌어져 파문을 빚은 바 있다. 2013년 서울백병원에서의 전공의 성폭력 사건, 성추행 및 성희롱 교수를 해임한 양산부산대병원, 강남세브란스 병원에서의 성추행 문제, 서울대병원 성추행 교수의 직무정지 등 언론을 통해 알려진 성폭력 문제가 적지 않았다. 게다가 지난 해 12월에는 유명 종합병원에서 간호사들을 성적 대상으로 만들며 갑질을 한 일이 알려지면서 세간의 공분을 자아냈다. 얼마 전에는 한 종합병원의 의사가 자신의 자녀에게 간호사에게 침을 뱉으라고 시킨 일이 알려지면서 의료계에 만연한 성폭력과 갑질 문화에 대한 성토가 이어졌다.

그러나 수많은 의료계 종사자들은 이렇게 알려진 사건들 이외에도 차마 털어놓지 못한 일들이 더 많을 것이라 입을 모은다. 다소 폐쇄적인 병원이라는 조직 구조의 문제 때문이다. 상하관계가 명확한 의료계에서 하급자는 상급자로부터 철저한 교육과 수련을 받게 된다. 이때 상급자로부터 나오는 성희롱 발언이나 성폭력 등은 고스란히 하급자가 감당해야 하는 것이다. 피해자가 자신의 성폭력 피해 사실을 밝히고 가해자의 처벌을 요구하고 나서면 직장을 떠날 각오를 해야 한다는 말이 괜히 나온 것이 아니다. 상명하달의 병원 조직 구조 속에서 상사를 고발하는 것은 자신의 지위와 직장을 포기해야만 가능한 일인 것이다. 한국여의사회 신현영 국제이사(명지병원 가정의학과)는 한 의료계신문과의 인터뷰에서 “교육자와 피교육자, 수직적 상하관계가 대부분인 의료계에서 성추행이나 성희롱이 발생하더라도 피해자는 이의제기가 쉽지 않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2017년 전공의 수련 및 근로환경 실태조사 결과를 보더라도 여성 전공의 가운데 48.5%가 성희롱을 겪었고, 16.3%가 성추행 피해를 입은 것으로 나타났다. 그러나 이들 피해자들은 수직적인 병원 조직체계로 인해 성폭력으로 인한 심리적 고통을 감수하며 외부에 고발하거나 가해자의 처벌을 강력하게 요구하지 못하고 있다. 어렵게 피해 사실을 고백하고 도움을 요청한다 하더라도 오히려 피해자의 신상이 노출돼 2차 피해를 입거나 가해자에 대한 솜방방이 처벌로 피해자가 이중의 고통을 겪는 경우가 적지 않다.

사회 전반에 미투 운동이 확산되면서 용기를 내는 의료계 성폭력 피해자들의 목소리가 조금씩 나오고 있는 현재, 이러한 성폭력 문제가 되풀이되지 않도록 가해자에게는 엄중한 처벌이, 피해자에게는 2차 피해를 예방하고 심리적 고통을 덜어줄 수 있는 안전장치의 마련이 시급하다. 또 무엇보다 의료계 종사자들 모두가 성폭력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가질 필요가 있다. 자신도 모르게 던지는 말 한 마디, 아무 생각 없이 한 행동 하나가 상대방에게는 성폭력으로 받아들여져 고통스러운 피해를 입힐 수 있다. 더 이상 의료계 성폭력 문제가 되풀이 되지 않도록, 그래서 국민들이 의료계에 대한 신뢰를 회복할 수 있도록 각 병원 단위에서부터 제대로 된 성폭력 예방교육으로 성폭력에 대한 인식을 변화시키고, 수직적인 조직 문화가 아닌 수평적인 조직 문화 정착을 위한 자정 노력이 필요할 것이다.

이호진 세민병원 부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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