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37)월남 패망과 양월계 여사

▲ 울산에 머물고 있는 베트남인들의 권익을 위해 힘쓰고 있는 양월계 여사가 “한국에서 산 지 40여년이 넘었지만 아직 한국 사람처럼 한국말에 익숙하지 못해 미안하다”는 말을 하고 있다.

사이공서 中식당 운영하던 부잣집 딸
현지서 한국인 남편 만나 2남2녀 낳고
월남 패망때 남편과 한국 넘어왔지만
한국인 아내 있는것 알게돼 망연자실

장사·막노동 등 험한일하며 가정 꾸려
나중엔 병든 남편·본부인 자녀 돌보며
뒤늦게 우리말 배우고 한국 국적 얻어
1992년 한-베트남 수교후 활동폭 커져

벚꽃이 휘날리는 4월을 항상 잔인하게 맞이해야 하는 사람이 울산에 있다. 1975년 4월30일 월남이 패망할 때 고국을 등지고 울산으로 왔던 양월계(楊月桂) 여사는 요즘도 4월만 되면 밤잠을 설치기가 일쑤다.

월남 패망 사흘 전 한국대사관은 월남에 거주하는 우리나라 기술자와 가족들에게 월맹의 침입으로 사이공이 함락될 위기에 있다면서 당분간 사이공 뉴우포오트 항에 정박해 있던 810함과 815함에 승선하라는 지시를 내렸다.

이 때 배를 탄 사람들은 사이공이 곧 안정을 되찾아 다시 그들의 일터와 집으로 돌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배를 탔다.

한국인 기술자 박모씨와 결혼했던 양 여사도 잠시 배에 머물다가 집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하고 남편과 자녀 3명을 데리고 배에 올랐다.

양 여사는 박모씨 사이에 4명의 자녀를 두었지만 막내는 이때 감기가 들어 함께 승선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막내도 함께 데리고 오려고 했지만 친정 부모가 “곧 집으로 다시 돌아올 것인데 감기 든 어린이를 배에 태우면 배 멀미로 고생을 하게 된다”고 말해 집에 두고 다섯 식구만 배에 올랐다. 그런데 승선한지 사흘 만에 사이공이 함락되면서 월남 전체가 월맹의 손아귀에 들어가고 말았다.

양 여사가 한평생 가장 후회했던 일이 이때 막내 딸과 함께 승선하지 못한 것이다. 월남이 패망하자 배는 한국으로 방향을 돌려 서서히 출항했다. 이때 양 여사는 눈앞이 캄캄했으나 이미 쏟아진 물이었다. 양 여사가 탄 815함은 17일 만에 부산항에 도착했다.

양 여사가 박모씨를 월남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66년 부친이 운영하는 식당에서였다. 양 여사 집은 할아버지 때 중국에서 베트남으로 건너와 사이공에서 큰 중국 식당을 차려 돈을 많이 벌었다. 이후 아버지가 이 식당을 물러 받아 양 여사 집안은 풍족하게 살았다. 사이공에서 야싱 여고를 졸업했던 양 여사는 1남7녀의 장녀로 대학은 가지 않고 식당 일을 하면서 아버지를 도왔다. 이때 미국회사 중장비 기술자로 월남에 왔던 박모씨가 이 식당을 자주 드나들었는데 둘은 6개월간 교제를 하다가 1967년 결혼했다.

▲ 함대는 월남이 패망한 1975년 4월30일 그녀가 타고 한국으로 온 815함의 사진이다.

박모씨는 월급이 1000달러나 되는 고급 기술자였다. 당시 월남 파병 사병들이 한 달에 50달러 정도 받았고 중장비 기술자들이 300~400달러를 받았던 것을 생각하면 박 모씨는 상당히 많은 액수의 월급을 받은 편이다.

둘은 결혼 생활 8년 동안 2남2녀를 두었다. 결혼 생활을 하는 동안 박모씨는 월급을 모두 한국으로 송금했지만 양 여사는 부모가 한국에 계시니 그런 줄만 알았다.

한국에 내린 양 여사 가족들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한국정부가 임시로 마련해 준 숙소로 자리를 옮겼다. 당시 우리 정부는 부산 서대신동 구 부산여고 자리에 피난민 숙소를 마련해 주었다.

“우리가 갑자기 철수를 했는데도 한국 정부는 우리의 철수를 예견이라도 한 것처럼 수용소 시설이 너무 잘되어 있었고 이곳에서 우리를 도와주는 한국인들도 대단히 친절 했습니다. 그래서 저는 지금도 당시 우리들에게 너무 훌륭한 수용소 시설을 제공해 주었던 박정희 대통령을 가장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수용소 생활 2개월 만에 청천벽력 같은 일이 터졌다. 수용소 입소 후 일주일 정도 되었을 때 남편 박모씨는 잠시 고향을 다녀오겠다면서 수용소를 빠져나갔다. 그때만 해도 양 여사는 남편이 돌아오면 자녀들과 함께 시가에 들어가 편안한 생활을 할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들떠 있었다. 그런데 남편이 떠난 뒤 한 달 정도 되었을 때 한 여자가 양 여사를 찾아 왔다.

이 여자는 자신이 박모씨의 부인이라면서 가족들을 데리고 함께 자기 집으로 가자고 했다. 월남에 사는 동안 남편의 결혼 사실을 전혀 몰랐던 양 여사는 그때를 회상하면서 “하늘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이 부인을 따라 양 여사가 자녀들과 함께 도착한 곳이 울주군 범서읍 삼호마을이었다. 집에는 남편의 또 다른 자녀가 둘이나 있었다. 이때부터 한 지붕 두 가족의 생활이 시작되었지만 이런 생활은 오래가지 못했다. 무엇보다 말이 다르다보니 소통이 되지 않았다.

2개월 정도 함께 살다가 양 여사는 자녀들을 데리고 인근 단칸방으로 무조건 나왔으나 당장 끼니를 때우는 것이 걱정이었다. 양 여사는 자신이 월남에서 일했던 중국식당이 생각나 중국집에서 나오는 밀가루 포대를 얻어와 이것을 잘라 봉투를 만들어 팔았다. 봉투가 돈은 되지 않았지만 그가 월남인이라는 것을 안 중국집에서 밀가루를 조금 포대에 넣어 주어 이 밀가루로 풀죽을 해 먹었다. 봉투 팔기가 힘들자 그는 길에 나가 파지를 주어 고물상에 가져다주는 일을 했지만 이 돈으로는 생활을 할 수가 없었다.

다음으로 시작한 일이 도넛 장사였다. 공장에서 도넛을 가져다 중앙시장 상인들에게 팔았다. 큰돈은 되지 않았지만 시장 상인들이 양 여사가 월남 여자라는 것을 알고 그나마 사주어 호구지책은 되었다. 양 여사가 중앙시장에서 도넛을 팔고 있다는 소문이 나자 시누이가 어느 날 시장으로 찾아 와 “마을 사람들은 오빠가 월남에서 돈을 많이 벌어와 우리를 부자로 알고 있는데 도넛 장사로 집안 망신을 시키지 말라”면서 도넛 통을 빼앗아 가는 바람에 이 장사도 오래하지 못했다. 이후 잠시 통닭 장사를 했으나 이 역시 외상이 많아 손을 들고 말았다.

이 때 그를 도와 준 사람이 현대자동차 간부 백선옥씨였다. 백씨가 양 여사를 공장으로 데리고 가 자동차 뒷문에 재떨이를 붙이는 일을 시켰다. 이 일을 하는 동안 그나마 식구들이 허기를 면했다. 그런데 이 무렵 남편이 갑자기 병이 나 양 여사 집으로 왔다.

박모씨는 월남에서 돌아온 후 홧김에 일은 하지 않고 술로 세월을 보내었는데 결국 귀국 7년 만에 중병에 걸리고 말았다. 그녀는 회사도 그만 두고 남편 간병에 매달렸다. 남편을 돌보는 동안 짬짬이 미용기술도 배웠다. 손재주가 좋은 그녀는 미용 기술은 빨리 익혔지만 한글을 몰라 미용사자격증 시험에서 여러 번 낙방했다.

그러자 미용학원 교사가 “그만한 기술이면 무허가로 미용실을 차려도 돈을 많이 벌수 있다”고 말해 양 여사의 말대로 ‘야미(무허가)’로 미용실을 차렸다.

미용 솜씨가 소문이 나면서 돈은 벌었지만 이웃 미용실의 고발로 파출소로 불려가 조사를 받고 벌금을 물어야 할 때가 잦았다. 이때 가장 힘들었던 일이 조사를 하는 경찰과 언어가 달라 소통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이때부터 그녀는 열심히 한글을 공부하고 우리말을 배웠다.

극진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남편이 돌아가자 다시 현대중공업 도장부에서 노가다 일을 했다. 이때는 본부인의 자녀 두 명도 양 여사 집에 합류했다. 배에 페인트를 칠 하는 도장 일은 남자들도 힘든 일이었지만 그는 5명의 자녀들을 굶기지 않기 위해 연장 근무를 밥 먹듯이 했다.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의 수교는 양 여사의 운명을 완전히 바꾸어 놓았다. 수교 후 월남 근로자들과 국제결혼을 한 월남 여인들이 울산에 많이 몰려오면서 그도 덩달아 바빠졌다. 그동안 한국어에 능숙해진 그는 베트남 노동자들이 사고를 일으킬 때 마다 공장으로 달려가 통역을 했고 때로는 경찰서에서 조사를 받는 베트남 근로자들을 통역을 할 때도 많았다.

요즘은 베트남 신부를 받아들인 농촌에서 가정 문제가 생기면 그를 부를 때가 많다. 이때는 단순히 통역만 하는 것이 아니고 베트남 신부의 권익을 위해 힘쓴다.

“베트남 여자를 아내로 둔 한국 남편들을 만나보면 대부분 언어불통에서 오는 불만이 많습니다. 그러면서도 아내를 집에만 잡아두려고 하지 이들이 한국말을 빨리 배울 수 있는 사회활동은 못하도록 해 가정불화가 생기는 경우가 많지요.”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그동안 고생을 많이 했지만 형민과 형호 등 아들은 물론이고 딸 영지도 모두 대학을 졸업한 후 한국 국적을 얻어 건전한 한국인으로 잘 살아가고 있다.

현재 그는 딸 영지와 함께 삼산동에 살면서 손자의 재롱에 빠져 있다. 국교 수립 후 베트남도 여러 번 다녀왔다. 그가 월남을 떠나 올 때 함께 데리고 오지 못했던 막내딸은 나중에 외할아버지 식구들과 함께 영국으로 나와 지금은 런던에서 잘 살고 있다. 그동안 그는 이 딸을 보기 위해 런던도 여러 번 다녀왔다.

울산 베트남인들 사이에 ‘베트남 대모’로 불리는 그는 “제가 베트남에서 산 기간이 30년인데 반해 한국에서 생활한 시간이 40년이 넘었고 한국 국적을 가진지도 오래되었지만 아직 한국말을 한국 사람처럼 못하고 한국문화에 익숙하지 못해 미안하다”면서 쑥스러워 했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저작권자 © 경상일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