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명림원지가 앞서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들이 제대로 알아듣지 못하는 게 아닐까. 하지만 나에겐 먼별을 바라보는 관측보다 우선 이 츱츱하고 퀴퀴한 뇌옥을 빠져나갈 구멍을 찾는 관찰이 필요하다.’

하지왕은 명림원지를 다시 한 번 살펴보았다.

쥐상에 곧추 서지 못한 등뼈로 인해 몸은 구부정하고 깡마른 체구로 외모는 볼품없다. 석공스님으로부터 소개를 받았을 때부터 하지왕은 명림원지를 옥골선풍에 학창선을 들었다는 제갈공명 상을 떠올리며 만나기를 학수고대했다. 그의 변설은 듣기에 휘황하고 어눌하여 소진장의나 태사령 우사보다도 못하다. 앞으로 좀더 두고 보아야겠지만 바둑판 전체를 읽은 큰 그림에는 강하나 돌과 돌이 부딪치는 수 싸움에는 약한 듯하다.

하지만 명림원지는 고구려의 뼈대가 있는 가문의 출신이다. 그의 중시조 명림답부는 어떤 사람인가? 하지왕은 고구려의 질자로 있을 때 태학의 박사로부터 고구려의 무수한 위인들의 업적과 행적에 대해 끊임없이 배우고 암송했다. 동명성왕, 부분노, 태조왕, 명림답부, 고국천왕, 을파소, 부분노, 두노, 유유, 밀우, 창조리, 을불, 소수림왕 등 별 같은 위인들 중에서 명림답부는 가장 뛰어난 영웅이었다.

명림답부는 고구려 7대왕 차대왕 때 연나부 출신의 강직하고 지혜로운 신하였다. 차대왕은 왕이 되기 전에는 한나라와 전쟁에서 여러 번 공을 세워 백성들로부터 추앙을 받았다. 하지만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즉위를 반대하던 우보 고복장을 제거했고, 선대왕의 아들인 막근과 막덕도 죽였다. 정적을 제거한 차대왕은 황음무도한 패도의 길로 갔다. 명림답부는 이런 왕에게 충언을 일삼아 미운 털이 박혀 유배를 여러 번 갔다. 게다가 가장 미약한 연나부 출신이라 차대왕 밑에서 20년을 봉직했으나 그의 관직은 고작 10관등 중 9위인 조위에 머물고 있었다.

왕의 패도정치로 민심은 떠나 있었고, 일식과 지진, 기상이변 등 자연재해마저 일어나자 너도나도 왕이 바뀌어야 한다고 떠들고 다녔다. 명림답부도 은밀하게 왕권 교체라는 큰 뜻을 품었다. 하지만 명림답부가 정변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한미한 존재였다. 조위라는 미관말직과 고구려 5부인 계루부, 관나부, 환나부, 소노부, 연나부 중에서 유일하게 권력에서 배제된 연나부 출신인 그로서는 할 수 있는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약점을 장점으로 바꾸기로 계획하고 착착 실행에 옮겼다. 그는 조위직이 갈 수 있는 최고의 보직인 궁궐 호위부대의 우두머리로 들어갔다. 그리고 정권으로부터 멀어져 있던 연나부 사람들을 자기 밑의 호위무사로 속속들이 충원했다. 그 중에는 연나부의 부족장인 상가, 패자도 있었다.

명림답부는 준비가 완료되자 차대왕이 주색에 절어있던 밤에 호위부대를 이끌고 야습해 직접 자기의 칼로 왕을 베어 죽였다. 명림답부는 왕을 죽인 뒤 곧장 왕궁을 장악하고 권력을 움켜쥐었다. 9관등 조의에 불과한 그가 권력을 쉽게 장악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공을 들인 연나부의 뒷배가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말 어원연구

을불: 우불, 을불리라고도 한다. 고구려 15대왕 미천왕의 아명. 창조리의 도움으로 소금장수에서 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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