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에서 찾지 못한 길이 참 많다

길을 잘못 잡은 이유는 모른다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은 어렵다

지금은 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나…

어떤 길이든 이미 너무 멀리 온길

▲ 어느 곳으로 가니-김아름作

하루에도 수많은 빌딩들이 올라간다. 우리는 수직으로 공존한다. 개개인의 생활공간은 한정되고 수용적이다. 개인의 감정이나 기억, 새로운 의미가 빌딩이라는 공간 안에 담겨 있다. 분절된 공간 속에서 단절된 삶을 살아가는 현대인들이다.

얼마 전 서울 딸집에 다녀왔다. 이십여 년을 살다가 떠나 온 지도 어언 또 그만큼의 세월이 흐르고 있다.

옛 시조에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은 간 데 없네’라는 구절이 있다. 하지만 그런 말도 현대엔 적용이 안 된다. 인걸은 말할 것도 없거니와 산천마저도 옛 모습을 찾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다. 유사 이래 이렇게 급 발전한 나라가 없다는 말만큼이나 옛 것들은 우리 곁에서 급격하게 자취를 감추고 있다.

아직도 가끔씩 연락을 주고받는 친구가 있기는 하지만, 무심한 세월 따라 묽어지고 희미해진 마음은 어딘지 모르게 겉돌고 서먹해지는 것이다. 벼르고 별러 함께 마련한 자리도 어색하고 멋쩍어지는 것은 나만의 느낌일까. 마주앉은 시간이 길어질수록 앉은 자리는 좀이 쑤시고 주고받는 말들은 점점 엉뚱한 방향으로 이어진다. 그렇게 세월이 가져다주는 막막함은 건너기 벅찬 여울을 만드는 것이다.

딸이 이사 간 동네는 복잡한 시내 한복판이다. 집 주변으로 사방팔방이 길과 길로 연결되어 있어 거대한 미로나 다름없다. 집 밖으로 나갈 때도 번번이 차를 타고 움직이니 길을 못 익히는 원인이기도 하지만. 나가는 길과 들어가는 길이 달라서 늘 처음 가보는 길이 된다. 길 한가운데 서서 어리둥절해 있는 내 모습이 영락없는 시골 촌닭이다.

언젠가부터 무릎이 아프고 시큰거리더니 통증이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아픈 티를 안내려고 애를 써도 어딘지 모르게 어색한 걸음을 본 딸이, 반강제로 병원치료를 예약했다. 비록 잠시 있는 동안이라도 관절 치료를 받아야 한단다. 다행히 오후에 출근하는 근무지라서 오전에 병원으로 데려다주고 집으로 데려 오고 나서 일터로 나가곤 한다. 그 정성이 눈물겨워 매몰차게 거절을 못하고 시키는 대로 꼬박꼬박 치료를 다녔다. 큰 기대를 안했는데 며칠간 다니니 통증이 훨씬 덜해서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문제는 치료 마지막 날에 생겼다. 딸에게 갑자기 바쁜 일이 생겨 병원에서 집으로 갈 때는 혼자 가야하게 생겼다. 병원에 나를 내려주며 딸은 혹시나 하고 몇 번이나 길을 일러준다. 나도 아파트를 나설 때 나름대로 주변 건물이나 길 모양을 눈여겨 봐뒀다. 그리고는 걱정 말라고 큰소리를 쳤다.

치료가 끝나고 삼월의 햇살이 귓전을 간질이는 거리로 나섰다. 그날따라 손바닥으로 햇볕을 가려야할 만큼 눈부신 봄볕이 쏟아지고 있었다. 사방을 휘둘러보니 올 때 잘 봐둔 덕에 대충 눈짐작으로도 집으로 가는 방향을 가늠할 수가 있었다.

조금 걸어가다 보니 가게가 안까지 툭 트여 시원한 느낌을 주는 청과상이 나왔다. 가게 안은 온통 초록 봄이 피어 난 듯 싱싱한 채소와 먹음직스러운 과일이 광주리마다 수북수북 쌓여 있었다. 그 싱그러움에 끌려 저절로 걸음이 멈추어졌다. 무, 배추, 상추, 쑥갓, 당근 등의 채소가 몸까지 상큼함으로 물들였고, 향긋하게 퍼지는 딸기 향은 입안에 침이 돌게 했다. 한참이나 그 향기와 색깔에 취해 있다가 딸기 한 바구니와 달래 한 봉지를 사들었다.

하늘은 구름 한 점 없이 새파랬고, 살랑이는 바람은 겨울이 끝났음을 알리는 듯 부드러웠다. 씽씽 달리는 차들이 뿜어내는 매연마저도 덜 독하게 느껴졌다. 이런저런 이색적인 풍경을 즐기며 천천히 큰 사거리를 건너고 다시 오른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그렇게 10분이나 걸었을까…. 예상대로라면 지금쯤 딸 동네 아파트가 보여야 하는데 눈앞에 보이는 풍경은 전혀 다른 장소가 펼쳐지고 있었던 것이다.

결국 지나가는 사람에게 길을 물을 수밖에 없었다. 맙소사! 딸집과는 정반대 방향으로 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동안 말문이 막혔다. 결국 다시 터덜터덜 가르쳐준 방향으로 되짚어 가다보니 저 멀리 오른쪽으로 딸의 아파트가 보이는 것이었다. 이렇게 방향감각이 없을 수도 있나…. 마음을 가라앉히고 다시 찬찬히 되짚어 보아도 알 수 없기는 역시 마찬가지였다.

저녁에 낮에 있었던 일을 말했더니 딸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실소를 한다. 엄마가 방향을 애초에 잘못 잡아서라며 별일 아니라는 듯 무심하다. 하지만 나는 길을 잘못 잡은 이유를 도무지 알 수가 없으니 답답한 노릇이었다. 딸은 내가 느끼는 낭패감과 상실감을 이해 못한다. 한 가지 생각을 따라서 줄줄이 떠오르는 장면이 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집을 못 찾아 우두망찰하던 치매 노인들의 모습이 오버랩 되면서 급 우울해진다.

이글을 쓰는 지금은 내려오는 KTX안이다. 창밖으로는 내 마음처럼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다. 창을 타고 흘러내리는 빗줄기가 오늘따라 처연하게 보인다. 회색유리창에 얼비치는 내 모습이 비 맞은 생쥐처럼 궁상맞게만 보인다.

돌이켜보면 내 인생에서 찾지 못한 길이 참 많다. 아직도 길을 잘 찾기보다 못 찾고 헤매는 일에 더 익숙하다. 낯선 길을 찾아가는 일은 언제나 어렵다. 지금은 내 길을 제대로 가고 있나…. 하지만 그 길이 어떤 길이든 이제는 너무나 멀리 오고 만 길. 그 길 위로 어둠이 깔리고 있다. 열차는 빠르게 풍경을 뒤로뒤로 보내버리고….

■ 전해선씨는

·2010년 월간 <창조문예> 신인 추천

·시집 <뒤가 이쁜>·울산중구문학회 회원

·시사랑 울산사랑 회원

■ 김아름씨는

·울산대학교 서양화과 졸업

·울산대학교 일반대학원 서양화과 졸업

·개인전 2회(반디갤러리, 갤러리201)

·단체전 특급소나기(울산문화예술회관) 감각의 온도(롯데백화점)

일천구백구십팔(맥화랑) 아시아프(동대문DDP) 등 다수 참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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