믹스커피와 유머로 활력…지방선거 한표 학수고대

▲ 올해 111세가 된 김소윤(울산시 중구 병영1동) 할머니, 김소윤 할머니는 밥은 걸러도 믹스커피는 하루에 서너잔씩 꼭 마신다.

호적상 1907년생이지만
“실제는 1906년생 말띠”
한국전쟁 당시 폭격 생생
“나이드니 사람이 그리워”
투표때마다 관심 쏟아져
내달 13일 손꼽아 기다려

마흔일 때 몰랐던 것을 쉰이 넘으면 알게 될 때가 있다. 환갑, 칠순을 넘기면 인생이 또 달리 보인다. 만약 백년을 산다면 인생은 또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다가올까. 그 지혜를 미리 안다면 우리 삶이 조금 더 향기로워지지 않을까?

올해 111세가 된 김소윤(울산시 중구 병영1동) 할머니가 그 해답을 들려줄 것 같았다. 울산시민 중 100세를 넘긴 사람은 30여명 정도. 김 할머니는 그 중 최고령자다. 할머니가 태어난 1907년은 을사조약의 부당함을 알리려던 헤이그특사 사건에 이어 고종이 퇴위한 해이기도 하다. 역사의 큰 풍랑 속에서 태어난 할머니가 백년을 살고, 또다시 십년을 더 사는 동안 일제강점기, 태평양전쟁, 광복, 6·25전쟁 등 현대사를 오롯이 겪어냈다.

하지만 할머니의 실제나이는 호적보다 1살이 많다. 본인이 ‘말띠’(1906년생)라는 말을 수차례 해 호적에 1년 늦게 올려진 것으로 보인다. 어쨌든 그 시기에 할머니는 울주군 두동면 두메산골에서 태어났다. 옹기와 숯을 팔던 아버지, 얼굴이 고왔던 어머니, 개구졌던 남동생, 이렇게 네 식구가 길섶 초가에 살았다. 김 할머니는 전설같은 그 시절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며 눈시울을 잠시 붉혔다.

전쟁 당시 군인들을 따라가며 폭격을 피했던 경험은 아직도 꿈에 나타날까 무섭단다. 인물만 좋았던 남편은 다시 생각해도 괘씸하다. 함바집으로 번 돈을 다 털어줬더니, 저축은커녕 놀음판에 다 갖다바쳤다고 했다. 보자기 채 버려진 아이도 데려다 키웠다. 그때는 다들 그렇게 살았다고 했다. 그래도 기력이 있을 때는 종이도 줍고, 남의 집 일도 할 수 있었는데, 지금은 그 마저도 힘드니 “세월이 제일 무섭다”고 말했다.

할머니는 외로움에 대해서도 숨김없이 털어놨다. “내 나이가 돼 보면, 해도 길고 밤도 길다” “울어도 시원찮을 판에 내가 윗는다(웃는다)” “너무 오래 살아서 큰 일이다!” “얼매나 오래살라 그카노 할까싶어, 병원 가기도 비끄럽다(부끄럽다)” 푸념이 이어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할머니는 아침 해가 뜨는 것이 가장 반갑다. TV 속 뉴스를 보면서 세상 돌아가는 흐름에도 관심을 두고 산다. 달력을 보면서 한 달여 뒤로 다가 온 지방선거일(6월13일)을 손꼽아 기다리는 것도 하루 일과 중 하나다. “나이들면 사람이 젤로 기럽다(그립다)”는 할머니는 투표를 할 때마다 쏟아지던 사람들의 관심이 그렇게 좋을 수 없었단다. 그래선지 인터뷰 내내 “한 표가 무섭다 안카나. 내 표 받는 사람이 당선된다”는 말을 몇 번이나 되풀이했다.

김 할머니의 기력은 연세에 비해 상당히 좋은 편이다. 큰 소리로 말하지 않아도 됐고, 소근거리는 소리에도 금세 대답이 돌아왔다. 가족, 건강, 취미 등 대화 주제가 바뀌어도 막힘이 없었다.

▲ 한달에 한 번 김소윤 할머니집을 방문하는 자원봉사자 김영숙 울산시미용사협회장이 할머니의 머리손질을 하면서 말벗이 되어주고 있다. 김동수기자 dskim@ksilbo.co.kr

TV 한글 자막도 척척 읽는다. 부지깽이로 써가며 어깨너머 한글을 익혔다던 할머니는 그 시절의 영민함을 백발 할머니가 돼서도 유지하고 있었다.

할머니의 활력은 생활 속 작은 변화에도 의미를 두고 감사하는데서 오는 듯 했다. 요즘말로 ‘소확행’(소소하지만 확실하게 행복을 안겨주는 어떤 것)이 할머니에게도 있었다. 바로 노란색 믹스커피다. 밥은 안먹어도 펄펄 끓는 믹스커피는 하루에도 서너잔씩 꼭 마셔야 한다. 이불, 화장대, TV로만 채워진 할머니네 안방에서 커피물을 끓이는 전기포트는 제일 중요한 세간살이가 됐다.

할머니를 행복하게 만드는 게 또 있다. 스스로 즐거움을 잃지 않으려는 것, 바로 유머를 유지하는 일이다. 백발 틈새로 검은 머리가 다시 나자 “회춘해서 좋겠다”는 사람들의 반응에 할머니는 “다부(다시) 살면 크일(큰일)이다!”라고 화답했다. 자원봉사자 김영숙(울산광역시미용사협회장)씨의 드라이 손질에도 “어지가이(어지간히) 해 놔라. 얄궂은 영감 따라붙는다”고 해 큰 웃음을 안겼다. 매일 방문하는 요양보호사 박연이(전 병영1동 삼일아파트통장)씨에게는 “내가 구신(귀신)이 돼도, 고마븐 건 안 잊을끼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thinpizza@ksilbo.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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