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예술편 (42) 활로

▲ 1955년 울산에서 발간된 잡지 <活路>. 이 속에는 김태근·이상숙·이용우 등 당시 울산에서 활발히 문학 활동을 했던 문인들의 글이 실려 있다. 그 동안 창간 소문만 있었지 책자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최근 이용우씨의 아들 상걸씨가 소장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울산 문단의 관심을 끌고 있다.

지역 문학·언론인 이용우씨의 장남
이상걸 재경향우회 부회장이 소장
창간호 이후 책자 발간되지 않아
김태근씨의 ‘울산읍의회에 고함’
이용우씨의 김수선의원에 ‘정서’
지역 정치인 비판하는 글로 주목

1955년 김태근·이상숙·이용우 등 당시 울산의 대표적인 문인들이 중심이 되어 만든 잡지 <活路>(활로) 창간호가 발견되어 울산문화계의 관심을 끌고 있다.

이 잡지는 해방 전후 울산에서 문학 활동을 활발히 했던 이용우씨의 장남 상걸(64)씨가 소장하고 있다. 울산문단에서는 오래전부터 이 잡지가 발간되었다는 소문이 떠돌았으나 실제로 이 책의 내용이 밝혀진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이씨는 현재 재경울산향우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이용우씨는 1919년 울산에서 태어나 경복고를 졸업한 후 해방 직후 김태근, 김용호와 함께 ‘울산문우회’를 결성한 뒤 문예지 <태화강>을 펴내기도 했다.

김태근은 2006년 발간한 <함월산>에서 ‘울산문단의 초석’이라는 제목아래 “해방 후 울산이 문화적으로 황폐했지만 다행히 1945년 10월 이용우, 김용호와 내가 ‘울산문우회’를 만들어 울산초유의 향토지인 <태화강> 1, 2권을 출간했는데 이것이 울산문단의 초석이 되었다”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용우씨는 1955년에는 <울산승람>(蔚山勝覽)을 출간하기도 했다. 이 책은 당시 울산에 산재해 있는 명소와 유적지, 세속과 풍습 심지어는 울산의 특산물인 미역과 미나리를 소개하고 울산의 철새 종류와 도래지까지 세심하게 기록해 놓아 ‘울산풍물의 보고서’로 불리었다. 이 책은 몇 해 전 이용우씨의 차남 상도(61)씨가 울산박물관에 기증, 현재 울산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이용우씨는 문학 활동 외에도 60~70년대 동아일보 지국을 운영하면서 스스로 지역 언론인으로 활동했고 4·19 직후에는 민주당 소속 경남도의원을 지내기도 했다.

<活路>의 창간사는 당시 울산상이용사회 이상은(李相殷) 회장이 썼다. 이씨는 방어진 출신의 육군 대위로 6·25 때 참전, 다리에 관통상을 입은 후 울산 도심으로 나와 복산동에서 살았다.

이외에도 이 책에는 김태근씨가 ‘울산읍의회에 고함’을, 시인 이상숙씨가 ‘미륵’을, 그리고 이용우씨가 당시 김수선 국회의원에게 보내는 글을 ‘情書’라는 제목으로 서간문 형식을 빌려 싣고 있다. 또 김극수 울산군수가 ‘사명완수를 위한 기원’을, 윤동인 울산경찰서장이 ‘明中之明·光中之光’이라는 제목의 수필을 기고했다.

이 잡지는 또 프랑스 작가 알퐁스 도데의 단편 ‘별’을 전면에 소개하고 있다.

김태근씨의 ‘울산읍의회에 고함’은 당시 울산사회의 가장 뜨거운 이슈였던 차용규 울산읍장의 사퇴 문제를 놓고 논쟁을 벌였던 울산 읍의원들의 자세를 강하게 질타하고 있다.

차씨는 당시 울산 읍의원 선거에 당선된 후 읍장이 되었다. 당시는 읍장을 읍의회에서 선출했다. 그런데 차 읍장 재임 중 세무서에서 울산읍에 수득세를 많이 매기는 바람에 농민들의 부담이 크게 늘어나자 차 읍장은 이에 항의했지만 세무서에서 수득세를 감면해 주지 않자 사표를 냈다. 이렇게 되자 읍 의회가 다시 읍장을 선출했는데 이 때 고기업과 박현호 읍 의원이 읍장 후보로 나서 고 의원이 읍장으로 선출됐다.

이에 대해 김태근씨는 차 읍장의 퇴임이 개인적 잘못에 있지 않고 주민들에게 과중한 수득세를 부과한 세무서 당국에 항의하다가 물러났기 때문에 읍 의원들이 의회 차원에서 세무서의 잘못을 나무라야 하는데도 읍장을 다시 뽑는 선거부터 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질타하고 있다.

당시 울산 읍의회는 15명의 의원이 있었는데 이들이 고기업계와 박현호계로 나누어져 읍 행정은 물론이고 읍의 각종 사안을 놓고 7대 8로 나뉘어 논쟁을 벌이는 바람에 읍의회와 집행부가 모두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이런 현상은 읍장 선거에서도 나타나 선거가 3차까지 진행되어 결국 고기업 의원 8표, 박현호 의원 7표가 나와 고 의원이 당선되었다.

읍장 선거가 1차에 끝나지 않고 이렇게 오래 지속되자 상대방 읍의원을 회유하기 위한 금품이 오가 읍민들을 크게 실망시켰다.

김태근씨는 이런 사태에 대해 읍 의회가 의회의 권위를 찾아야 하고 주민들 역시 이렇게 주민의 뜻을 외면하는 읍 의원들을 다음 선거에서는 올바른 심판을 해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해방 직후 울산 문화계의 구심점 역할을 했던 김씨는 1945년 광복과 함께 ‘울산건국청년단’을 창단해 울산의 치안을 바로 잡는데 노력했다. 이후 연극인·극작가·수필가로 활동하면서 수필집 <태화강>과 문화논설집 <함월산>을 출간했다.

나중에 울산의 중진 시인이 되는 이상숙은 ‘미륵’이라는 제목의 시를 이 잡지에 기고했다.

‘당신은 하늘처럼/千길 높으신 곳에 그대로/ 의젓이 앉으시었네//당신께옵선 아픔의 두려움을 느끼신 마음이 있나이까//Z機의 狂音을 듣는 귀가 있나이까/을시년스러운 財物도/삼실 마양 서린 情도 있나이까-//당신에겐 개암알 보다 구수한 情이 있고/木鐸소리 보다 깊은 고요가 있나이다/그러나 당신은/바다보다 넓은 마음이 있고/파도보다 거센 힘이 있나이다/아 바꿀 수 없는 실재여!//날연한 손들이/당신께 매어 달리히고/초점 잃은 눈들이/당신의 손짓만 기다리나이다.’

이상숙씨는 시내 성남동에 명다방을 운영하면서 60년대에는 민주당의 최영근 국회의원을 지지하며 야당 활동을 오랫동안 했다. 최 의원이 7대 총선에서 낙선한 후 제일생명 사장으로 갈 때는 서울로 함께 가 서울에서 오랫동안 시작활동을 했던 그는 몇 해 전 타계해 현재 성신고등학교 앞 정원에는 그의 시비가 있다.

이용우씨의 ‘情書’는 김수선 국회의원이 자유당에 입당한 것을 비난 하는 글을 싣고 있다.

김씨는 당시 3대 총선에서 무소속으로 출마해 당선 되었다. 그런데 당선 후 곧 자유당에 입당하는 바람에 울산군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았다.

이를 의식했던 김 의원은 울산 전역을 돌면서 ‘내가 자유당을 택한 이유’라는 제목으로 강연을 했다. 그는 연설에서 자신이 자유당에 입당한 것이 자유당이 좋아서 들어간 것이 아니고 여당인 자유당이 너무 정치를 잘 못해 이를 시정하기 위해 ‘호랑이 굴’에 들어갔다고 말했다. 그는 ‘호랑이를 잡기 위해서는 호랑이 굴에 들어가야 한다’고 강변했다.

그러나 주민들은 이런 변명을 하는 김 의원을 더욱 미워했다. 심지어는 김 의원이 태화강 상류 지금의 구영리 다리 밑에서 목욕을 했는데 이 때 마을 노인들이 강변으로 몰려가 “강물을 더럽힌다”면서 김 의원을 쫓아내는 바람에 그는 옷도 입지 못하고 도망을 가야 했다.

이용우씨는 잡지에서 김 의원의 자유당 입당은 김 의원이 아무리 변명을 해도 울산 갑구 10만 군민들의 민의를 저버린 행위라고 나무라고 있다.

이씨는 울산군민들이 제헌국회의원을 지냈던 김 의원이 2대 총선에서 낙선했지만 다시 한번 3대 총선에서 당선시킨 것은 김 의원이 자유당의 독재를 막아 줄 것을 기대했기 때문인데도 이런 군민들의 기대를 저버리고 자유당에 입당한 것은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행동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당시만 해도 요즘처럼 민의가 발달되지 않아 문인들이 읍의회와 국회의원을 비난하는 글을 쓴다는 것은 위험을 감수해야 했다.

그런데도 김태근씨와 이용우씨가 이런 글을 기고했다는 것은 상당히 용기 있는 행동으로 볼 수 있다.

▲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김수선 의원은 제헌의회에서 이미 이승만 정권의 장기집권을 예견하고 내각제 개헌을 주장하면서 의정단상에서 2시간 동안 연설을 하는 등 고도의 정치력을 발휘했다. 아울러 농민을 위해 농지개혁법 시행에도 앞장섰지만 이 무렵 자유당에 입당함으로 이후 다시는 금배지를 달지 못했다.

<活路>에 대해서는 군민들의 기대도 컸던지 울산군청의 공무원과 사회의 각종 지도자들이 축하 광고를 많이 실었다. 광고를 실은 사람들 중에는 고기업 울산읍장, 박성렬 교육감, 김차호 자유당 울산갑구 위원장, 태화상회 최두칠 대표 등 우리들에게 눈에 익은 인물들도 보인다.

특히 울산을 대표하는 주류회사였던 ‘산천학’은 회사대표 고극일 이름으로 전면 광고를 싣기도 했다.

<活路>는 창간호를 낼 때만 해도 군민들의 호응이 컸던지 편집자는 따로 사고를 내고 ‘한정된 지면과 급박한 시일 때문에 이미 접수한 원고가 많지만 이번에 싣지 못한 원고는 다음호에 싣겠다’고 약속하고 있다. 그러나 이후 책자가 발간되지 않아 이 약속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장성운 울주문화원 이사 전 경상일보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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