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구투야는 거련태자를 인질로 잡고 산천이 드르렁 울릴 정도로 우렁우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놈들! 썩 물렀거라! 대왕의 유언을 듣고 평생 품고 온 복수의 마음을 어리석게도 잠시 버렸다. 헌데 네 놈들은 대왕의 유언을 헌신짝처럼 버렸다. 다시 복수의 칼을 든 마당에 이제 용서는 없다!”

구투야는 임종의 자리에서 용서와 평화를 구하는 대왕의 참회에 얼어붙은 복수심이 봄눈 녹듯이 하였다.

‘내가 그동안 가족의 복수에만 칼을 갈았다. 태왕은 죽이기에 너무 큰 인물이다.’

다 죽어가는 임종의 자리에 칼을 품고 온 것을 후회하기도 했다. 하지만 주변의 용렬한 사람들을 보고 잠자고 있던 내면의 복수심이 활화산처럼 끓어올라 그예 폭발한 것이다.

구투야는 산적 두령으로 검바람재에서 금관가야, 비화가야, 대가야, 성산가야를 내리누르고 하지왕을 구하기 위해 녹림떼를 이끌고 사물가야를 쳐들어가 나라를 전복시킨 가야의 괴걸이었다. 죽이려는 자는 다수이고 구투야는 혼자지만 그 포효하는 모습이 호랑이처럼 사납고 태산처럼 위풍당당하여 누구도 감히 다가갈 수 없었다.

급작스레 인질로 잡힌 거련은 눈방울만 굴리고 있었다.

그때까지 아무 말이 없었던 상희공주가 애절하게 소리쳤다.

“꺽감 오빠, 어떻게 해봐요. 저 자는 오빠의 부하잖아요!”

상희는 어릴 때부터 용모 단정하고 영민한 꺽감을 좋아했다. 꺽감이 침전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처음에는 놀랐으나 헌헌장부로 변한 모습이 멋져보였다. 그동안 풍문으로 꺽감의 소식은 간간이 들었으나 꼭 한번 보았으면 했다. 더욱이 어머니 장화왕후가 자신을 신라 왕 실성에게 시집을 보내려고 혼담을 넣은 때라, 꺽감이 더욱 보고 싶었다.

꺽감이 침전으로 불쑥 들어왔을 때 놀라면서도 내심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하지만 지금 아버지의 죽음에 이어 거련 오빠가 죽음 일보 직전에 몰리자 오로지 거련을 살릴 생각밖에 없었다.

순식간에 뒤로 몰린 하지왕도 이 급박한 상황을 수습해야 했다.

어린 시절 이후 처음 만난 태왕과 장화왕후, 거련과 상희에 대한 생각들이 번갯불처럼 스쳐지나갔다. 따뜻한 가야 땅에서 오삭오삭 추운 고구려의 질자의 생활은 고단하고도 긴장된 나날이었다. 하지만 이들과 인연을 쌓으며 들 언덕에 피어오르는 아지랑이 같은 아련한 행복감을 느꼈다. 애환의 고구려 질자생활은 이후 이어진 험난한 그의 여정에 큰 밑거름이 되었다.

애음 끊어지는 듯한 상희공주의 말에 하지왕이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 나왔다.

하지왕은 거련태자 앞에 무릎 꿇고 큰 절을 했다.

“대왕마마, 소신을 용서하소서. 구투야가 차마 이런 일을 저지를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하였습니다.”

그리고 구투야를 향해 크게 꾸짖었다.

“구투야, 태왕이 임종한 신성한 침전에서 이게 무슨 짓이냐. 어서 칼을 거두어라!”

 

우리말 어원연구

그리고, 그라구. 【S】graha(그리하), 【E】figure out. 사투리 ‘그라구’는 ‘이해하고 이어’라는 뜻이 있다.

(본보 소설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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