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하기 / 그림 이상열

▲ 그림 이상열

그동안 명림원지는 고두쇠와 텁석부리를 통해 고구려의 정세를 보고받고 있었다. 광개토태왕이 죽고, 장수왕이 등극한 것과, 임종의 자리에서 하지왕이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되었다는 소식을 듣자 즉시 대가야 어라성의 집사, 박지에게 달려갔다.

박지는 하지왕의 책사, 명림원지를 보자마자 말했다.

“명림원지, 네 놈 잡기를 학수고대했다. 헌데 웃통을 벗고 제 발로 호랑이굴로 뛰어 들어오다니 이렇게 고마울 데가. 여봐랏, 이 역적 놈을 당장 포박하라!”

군신지 석달곤이 즉시 명림원지를 포승줄로 묶었다.

명림원지는 몸이 묶여도 태연하게 껄껄 웃으며 말했다.

“집사님, 정녕 광개토태왕이 승하하기 전 하지왕을 대가야의 왕으로 책봉하고 자신의 딸, 상희공주를 대가야의 왕비로 내어준 것을 모른단 말이오?”

“엥, 광개토태왕이 승하하셨다고? 그게 무슨 제석항아리에 뛰어든 말×같은 소리냐?”

박지는 천하를 호령하던 젊고 건장한 고구려 태왕이 죽었다는 말이 믿기지 않았다.

“외교의 귀재라는 집사님이 이렇게 주변 정세에 어두워서야 어떻게 대가야가 살아남겠소?”

“네 놈이 옥중에서 잔꾀를 부려 사물가야의 한기를 갈아치운 것을 알고 있다. 또 무슨 허튼 수작을 부리려고 여기를 찾아왔단 말인가.”

신라장군으로서 대가야의 군신지가 된 석달곤도 버럭 화를 내며 명림원지에게 말했다.

“고구려 상희공주는 신라대왕 실성마립간과 혼약을 약조한 사이다. 어디서 거짓 주둥이를 함부로 나불거리느냐?”

명림원지는 포박을 당했으나 여전히 얼굴에 웃음기를 거두지 않고 말했다.

“하하, 석장군! 나라의 이익을 위해선 약조 따윈 헌신짝처럼 버린다는 것을 모른단 말이오? 장수왕은 남진정책을 수행하는데 신라의 실성왕보다 대가야의 하지왕이 더 적임자라고 판단했소이다.”

명림원지는 박지에게 미소 속에 칼을 감추고 부드럽게 말했다.

“박집사님, 내가 알기론 그대는 매우 총명한 분으로 알고 있소. 조금 있으면 하지왕과 상희공주는 고구려 대왕의 칙명을 들고 이곳 대가야에 도착할 거요. 그러면 당신과 당신이 세운 허수아비 구야왕을 비롯해 박씨 가문은 멸문지화를 당할 터인데 대비를 해야하지 않겠소이까? 하지왕에게 맞서기보다 우리 서로 지혜를 모아 대가야를 새롭게 재건하는 게 어떻겠소. 그것이 제가 맨몸으로 이곳을 찾아온 이유요.”

박지는 명림원지에게 의심의 눈초리를 거두지 않았지만 속가슴은 덜컥했다. 명림원지는 ‘좌경천리 입경만리’의 재사라고 소문이 파다한데 만약 이놈의 말이 맞다면 멸문지화는 불을 보듯 뻔한 일일 것이다. 일단 이놈을 감옥 안에 처넣고 돌아가는 상황을 살펴보는 것이 현명하다는 생각을 했다.

“석장군, 이 놈을 감옥 안에 처넣으시오.”

석달곤이 칼을 빼들고 소리쳤다.

“집사님, 이놈을 베어버립시다. 감옥에 처넣었다가는 또 무슨 야료를 부릴지 모릅니다.”

 

우리말 어원연구

좌경천리 입견만리(坐景千里 立景萬里): 앉아서 천리를 보고, 서면 만리를 보는 예지력을 지녔다는 뜻.

(본보 소설삽화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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