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룡사·영흥사·영묘사·분황사 등 법흥왕 이래 선덕왕에 이르기까지 6~7세기 경주 지역에 집중 건립된 거대 사찰이 하천범람을방지하는 치수(治水) 기능을 겸했다는 파격적인 주장이 제기됐다.

 서울대 지리학과 대학원 이기봉(35)씨는 최근 제출한 박사학위 심사 통과 논문 "신라 왕경(王京)의 범위와 지역에 관한 지리적 연구"에서 중고기 왕경(경주)일대 거대 사찰이 들어선 지정학적 위치와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주목하면서 이같이 말했다.

 이씨는 이 무렵 건설된 사찰 대다수가 서천(西川)과 기존에 북천(北川)의 범람영향을 받던 곳에 자리잡고 있었으며 또 사찰이 들어서기 전에는 황무지나 늪이었음이 고고학적 발굴성과로도 확인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이를 발판으로 논문은 "이는 하천범람에서 왕궁이나 왕경 집단거주지를 보호해주던 늪지라는 완충지대를 신라인들이 파괴했음을 의미한다"면서 "사찰 건립은 그러한 제방공사의 일부분으로 진행되었을 가능성이 사찰 입지의 분포에서도 확인된다"고 덧붙였다.

 황룡사를 비롯한 경주시대 거대 사찰에 대한 개별 연구성과는 많으나 이를 치수와 관련시킨 주장은 없었으며 더구나 이번 논문처럼 장구한 신라사 1천년과 운명을 같이하는 경주에 대한 연구를 지리학적 관점에서 접근한 글도 처음이다.

 논문은 신라 왕경의 태동과 팽창, 변모를 다각도로 검토하고 있다. 우선 경주가영일만으로 흘러나가는 형산강 본류인 서천과 그 지류들이 북천 및 남천(南川)이 합류하는 평야지대에 자리잡고 있다는 사실을 주목한다.

 글은 이런 지리적 특성으로 인해 신라는 물론이고 고려-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경주의 범람에 대한 기록이 끊임없이 발견된다고 지적하면서 이런 홍수 기록 대부분이 경주시내를 관통하는 여러 하천 중에서도 유독 북천에 밀집돼 있음을 주시한다.

 이씨는 지리적 특성으로 보아 그럴 수밖에 없다고 본다. 즉, 북천은 경주시내동쪽 계곡을 흐르다가 소금강산과 명활산 협곡을 지나며 갑자기 현재의 경주시내 평지와 만나는 지리적 특성 때문에 빈번한 범람을 유발했다.

 나아가 논문은 북천의 범람 경로를 고고학적 발굴성과를 토대로 추적한다. 이에따르면 북천 본류를 벗어난 물은 분황사·황룡사-안압지 북쪽-월성북쪽-월정교 터-남천을 따라 흘렀다. 이러한 발견은 이번 논문에서 장구한 신라 왕경의 역사 복원을 위한 씨줄이자 날줄이 된다. [연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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