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버버의 미술관 짓는 이야기
수백만 사람들 원하는 예술
보물 아닌 그들 자신의 미술

 

“아담 버버는 대부호이자 미술수집가이다. 그는 자신의 부(富)를 만들어 준 노동자들에게 빚을 갚기라도 하듯 ‘미술관 중의 미술관’을 지으려 한다. 그는 훌륭한 미술관의 활짝 열려진 창으로 수백만의 사람들이 찾아올 것이며, 사람들이 가진 추함(醜)에 대한 속박을 벗어나리라 생각한다. 그래서 그의 ‘미술관 중의 미술관’은 신성한 것으로 가려진 보물들만 모시는 저장소가 되어야 했다. 그런데, 실제로는 도요새처럼 떠들고 지나가는 초등학생 무리만 빼놓는다면, 거대한 텅 빈 공간일 뿐이었다.”

이 이야기는 예술철학자 단토(A. Danto)가, 동시대 예술 현상을 설명하기 위해 인용한 소설 『황금접시(The Golden Bowl)』(1904)의 주인공 아담 버버(A. Verver)가 미술관을 짓는 이야기이다. 단토의 핵심은, 수백만의 사람(people)들이 갈망했던 예술은 보물들(fine art)이 아니라 ‘그들 자신의 미술’이라는 것이다.

버버의 미술관은 권력이다. 버버의 발상은 표면상 대중의 이익을 위한다는 명목이 있지만, 실상 대중들 자신은 미술의 선택에 아무런 발언권을 가지지 못했다.

미술관이 제단의 신전처럼 고압적인 모습인 것도, 조각품이 언제나 높다란 받침대 위에 모셔진 것도, 모두 예술을 구차한 현실과 대중(people)을 초월한, 숭배의 대상으로 추켜세우기 위함이었다.

예술(Art)은 고대 때부터 테크네(techne)라는 기술 속에 포함되어 있었지만, 18세기 신흥 자본계급들이 자신과 민중을 구별하기 위해 고상한 예술(fine art)과 비루한 공예(craft)를 분리시켰다. 이러한 예술의 역사는 감추어진 채, 우리는 조각가와 석공의 차이를 묻는 미술시험을 쳐야 했다. 급기야 어떤 이는 민중을 개·돼지라고 하기에 이르렀다.

민선7기는 미술관 건립과정에 시민 의견을 충분히 반영하지 못했기에 공론화과정을 다시 밟고자 한다. 한편 시립미술관의 설계까지 마친 지금, 재논의는 예산낭비와 여론분열 등 손실이 클 것이라는 우려도 있다. 민선7기의 시민공론화는 역시 미술관의 주인은 시민이라는 시정철학과 연관이 있는 듯하다.

만약 그렇다면 좀 더 용감해져야 한다. 버버처럼, 시민을 위한다면서 “좋은 거니까 주는 대로 먹어!”가 되어서는 안 된다. 제니 해리스(J. Harris)는 “주류 예술은 이야기할 만한 사람들의 이야기일 뿐이고, 대부분의 사람들의 역할은 티켓을 사서 조용히 듣는 것 뿐 이었다.”

▲ 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따라서 좀 더디고 실수가 있더라도 시민들이 자신의 이야기를, 직접 만들고 표현케 함으로써, 시민을 강해지게 돕는 예술과 실천이 필요하다. 시립미술관, 최고작품의 전시공간도 좋고 누구나 찾을 수 있는 복합문화공간도 좋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시민의 이야기와 시민의 솜씨가 만발하는 장소여야 한다.

‘토지 매입과 건축비만 200억 엔을 들였지만, 연간 180억 엔 경제효과를 본다’는 가나자와의 21세기 미술관. 이 미술관은 처음부터 미술관으로 계획하고 만든 것이 아니라 공예도시로의 역사와 도시비전에 대한 시민토론의 결과물이다.

이 미술관 역시 시민예술촌이 있어 존재한다. 시민예술, “그런데 그게 예술이냐?”고 묻는 사람이 있다. 이제 용기 있게 대답하자. “그런데 그게 중요하냐?”고.

이강민 울산미학연구소 봄 대표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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