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판 영문서비스는 외국인 위한 것
외국인이 이해못할 표기는 무용지물
눈높이행정의 세심한 배려가 있어야

▲ 최연충 울산도시공사 사장

요즘은 교통표지판에 의존하지 않고도 운전하는데 별 불편함이 없는 세상이다. 흔히 ‘네비’라 불리는 길안내 도우미의 기능이 워낙 좋아진 덕분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교통표지판이 아예 없어도 좋다는건 아니다. 여전히 교통표지판은 다양한 방식으로 사람들에게 필요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그런즉 기왕 설치하는 거라면 안내 내용이 제대로 표기되어야 그 효용이 높아질텐데, 현실은 꼭 그렇지만은 않다.

특히 표지판마다 친절하게 곁들여놓고 있는 영문 표기를 볼 때마다 영 개운하지가 않다. 영문을 병기하는 목적이 외국인의 이해와 판단을 돕기 위한 것일진대, 과연 현재의 영문 서비스가 수요자인 외국인의 눈높이에 맞추고 있는지 의문이다.

우선 고유명사 표기방식부터가 일관성이 없다. 예컨대 한강은 ‘Han River’로 표기하면서 남한강은 ‘Namhan River’로 쓰지 않고 ‘Namhangang River’로 쓰는 식이다. 한번 생각해보자. 영남알프스를 찾은 외국인 관광객이 ‘Sinbulsan’이라고 붙여 써놓은 표지판을 보고서 과연 어떤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것인가. 이 경우는 ‘Sinbul Mountain’ 또는 ‘Sinbul Mt.’으로 표기하는게 옳다. 그래야 신불산을 모르는 외국인이라 할지라도 적어도 근처에 유명한 산이 있구나 하고 감(感)은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낙동대교를 ‘Nakdong daegyo’로 표기하는 것도 납득할 수 없다. ‘daegyo’는 외국인에게는 아무런 뜻도 전달되지 않는 정체불명의 단어다. 낙동강을 가로지르는 큰 다리이니 ‘Nakdong (grand) bridge’로 써주는게 맞다. 무턱대고 소리나는 대로 옮겨적는 건 곤란하다. 한편 북부 고속도로는 ‘Bukbu Expressway’로 표기하는데, 이 경우의 ‘북부’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방위를 가리키는 단어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당연히 ‘North Expressway’로 적어주어야 외국인을 위한 길 안내 취지에 맞을 것이다. 심지어 순환도로를 ‘Sunwhandoro’로 써놓은 곳도 있다. 어이없는 일이다.

이보다 더 심한 사례도 있다. 고속도로를 달리다 보면 터널이 연이어 나오는 구간이 많은데, 이런 경우 흔히 ○○ 1터널, ○○ 2터널, ○○ 3터널… 식으로 이름이 붙는다. 표지판을 유심히 보면 한글 아래에 영문으로 ‘○○ 1(il) tunnel’ ‘○○ 2(i) tunnel’ ‘○○ 3(sam) tunnel’로 표기돼 있다. 한마디로 넌센스다. il, i, sam이 무슨 뜻을 지녔단 말인가. 더욱이 아라비아 숫자는 세계 공용으로서 그 자체로 뜻이 통하는데 굳이 괄호 안에 저런 사족을 덧붙일 이유가 없다. 시내 가로명도 이치에 닿지 않는 영문 표기가 도처에 널려있다. 중앙로를 ‘Jungang-ro’로 표기하는 것부터가 그렇다. 우리가 한수 아래로 여기는 중국조차 路는 Road로 표기한다. 세부 가로구분은 더 심하다. 예컨대 4번길을 ‘4beon-gil’로 쓰는데, beon이나 gil을 외국인이 무슨 뜻으로 받아들이겠는가. 둘 다 의미없는 철자의 나열일 뿐이다. 영문 안내 서비스에 충실하자면 ‘4th Street’ 식으로 써주는게 맞다.

현재 도로표지판의 영문 안내표기는 ‘도로표지 제작·설치 및 관리지침’에 따르고 있는데, 이 지침은 ‘외국인이 이해하기 쉽도록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표기해야 한다’는 기본원칙을 제시하고 있다. 영문표기 서비스의 대상이 외국인임을 분명히 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외국인에게 정보가치가 있어야 한다. 거듭 말하거니와 표지판 영문 서비스의 수요자는 내국민이 아니라 외국인이다. 그들이 가려워하는 곳을 긁어주어야 마땅하다. 눈높이행정, 결코 멀리 있는게 아니다.

최연충 울산도시공사 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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