울산을 그리고 세상을 읽는다 - 6. 태화루와 시문 - 울산 역사·문화의 보루(寶樓)

▲ 2018년 9월. 태화루(太和樓 ). 106 X 48㎝.한지에 수묵담채.

태화강변에 있던 태화루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2013년 새로 건립한 태화루는
원래 태화루가 있던 장소에서 의연하게
태화강을 굽어보고 있다.

태화루 시문을 한번도 읽지 않고
울산의 역사를 안다고 행세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라.
울산이 그들을 부끄러워한다.

태화루는 울산 역사와 문화의 상징이며 보루(寶樓)이다. 그것을 보여주는 것이 태화루 시문이다. 시문 없는 태화루는 그냥 건축물일 뿐이다. 마찬가지로 태화루 시문 없는 울산 역사와 문화는 빈궁할 뿐이다. 이 같은 사실(史實)을 <태화루 시문>(한국문화원연합회 울산광역시지회, 2011년)은 세세하고도 쉽게 우리에게 전한다. 이 책의 기록은 말한다. 대화사는 신라 선덕여왕 17년(643) 자장율사가 창건했다. 당시 태화루는 대화사의 누각이었다. 고려 성종은 997년 울산에 왕림하여 태화루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명종(1170~1179) 때 김극기는 ‘대화루 시서’를 남겼다. 그는 글에서 울산 옛 이름인 ‘흥례부, 계변천신, 학성’을 말하고, 시에서는 태화루 주변 풍경을 “북으로 푸른 산이 둘렀고/ 남으로 대나무 숲 물결이 휘감네”라고 읊었다.

▲ 울산 태화루

조선시대에 들어와 태화루는 태종 원년(1401)에 중수되었다. 권근의 <대화루기>는 민제의 요청으로 경상도안찰사 안노생과 지울주사 손광연이 중심이 되어 건립했다고 했다. 김종직은 세조 때인 1460년 경상좌도병마평사로 울산에 부임하여 약 2년간 근무했다. 이때 그가 남긴 ‘태화루에서 세번과 함께 읊다’에서 태화루 풍경을 생생하게 드러내었다. 전체 8행이지만 두 행씩 선경(先景)과 후정(後情)을 짝으로 배열했다. 즉 선경-후정-선경-후정으로 되어 있다.

“황룡연 신기루는 태화루가 되었고/ 신학성 성 머리엔 가을이 깊었구나./ 시를 읊으니 좋은 고을 부임이 부끄럽고/ 누각에 오르니 명류(명사들)에 끼여 기쁘구나./ 피어오르는 저녁노을은 어시장에 자욱하고/ 흐느끼는 찬 밀물은 모래톱을 적시누나./ 벽에다 취한 붓 한 번 휘두르지 않는다면/ 질탕한 두 해 놀이를 그 누가 알아주리.”(송수환 역)

1행에서 태화루의 황룡연(지금 용검소)에 비친 모습을 황룡연의 신기루라고 뒤집어 표현했고, 2행은 신학성(울산)의 가을 풍경이다. 3행과 4행은 부끄러움(겸양의 마음)과 기쁨의 마음을 말했다. 5행과 6행은 태화루 주변 풍경을 시각(저녁노을)과 청각(흐느끼는 모래톱), 촉각(찬 모래톱) 등의 감각을 동원했다. 7행과 8행은 울산에서 벼슬하는 두 해를 질탕한 풍류로 여긴다고 했다. 5,6행의 저녁노을과 어시장의 자욱한(어두운) 풍경과 흐느끼고 차가운 밀물은 활달하고 호탕한 심정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대비와 복합 이미지를 구사한, 탁월한 표현이다.

조선 성종 15년(1484)에 울산군수 박복경이 다시 중수하였다. 서거정은 <태화루중신기>에서 이 중수의 자세한 내력을 밝혀 놓았다. 그는 중수 이전인 1479년에 태화루에 올라 지은 ‘울산 태화루’라는 시에서 울산 역사와 문화를 압축하여 고도의 은유(메타포)로 나타내었다.

“울산 서쪽 언덕 태화루/ 거꾸로 선 그림자가 푸른 물에 잠겼네./ 처음에는 너무 넓어 학 등을 탔나 했더니/ 어렴풋이 알겠네. 자라머리에 올랐음을./ 산 빛은 가까이 계림 새벽에 닿았고/ 바다 기운은 멀리 대마도 가을에 이었네./ 만리타향에서 조망의 흥취 다하지 못했는데/ 하늘 가득한 비바람에 난간에 기대어 시름 젖네.”(송수환 역)

1행은 태화루 위치, 2행은 태화루 풍경을 시각적으로 처리했다. 3행은 ‘학’이 학성, ‘자라’는 삼산을 뜻함으로 울산 역사와 지리적 환경을 압축적 은유로 표현했다. 4행과 5행은 원경으로 시간과 공간 속에 위치한 울산, 즉 ‘산 빛과 바다 기운, 계림과 대마도(공간), 새벽과 가을(시간)’의 대비와 대구로서 울산이 육지로는 경주, 바다로는 대마도까지 이어져 있다는 것을 절묘하게 나타내었다. 7행과 8행은 태화루에서 풍경의 흥취를 다하지 못한 안타까움을 말했다. 태화루에서 느끼는 울산의 풍광과 감회가 절절하다.

태화강변에 있던 태화루는 선조 25년(1592)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졌다. 2013년 새로 건립한 태화루는 원래 태화루가 있던 장소에서 의연하게 울산 역사와 문화를 상징하는 자긍심으로 태화강을 굽어보고 있다. 그러니 태화루 시문을 읽어본 사람은 태화루 시문을 한번도 읽지 않고 울산의 역사를 안다고 행세하는 사람들을 의심하라. 특히 태화루 시문을 읽지도 않고 알려고도 하지 않은 채 울산의 문화를 위한다고 말하는 지도자들은 믿지 마라. 울산이 그들을 부끄러워한다.

그림= 최종국 한국화작가

글= 문영 시인·비평가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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