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어느새 가을은 쌀쌀함을 품었다. 덩이덩이 피어나 노변(路邊)을 밝히던 백일홍 꽃잎들은 피었던 자리마다 토실한 열매만 맺어둔 채 하나 둘 자취를 감추었고, 처량하게 녹슨 잎들만이 만추(晩秋)의 햇살을 향해 몸을 비튼다. 코스모스 철없이 여린 꽃잎들도 곧 겨울을 예감한 듯 늦가을 햇살을 쫓느라 여념이 없다.

식물들은 빛을 이용해 에너지(포도당)를 합성한다. 하지만 인간의 신체와 빛의 관계는 이보다 훨씬 더 근본적이다. 얇은 막에 둘러싸인 세포 속 미토콘드리아는 빛에 민감한 분자들로 가득하다. 빛의 입자가 피부를 통해 들어와 이들과 접촉하면 세포내에서 에너지의 생산과 저장과정이 촉진된다. 이렇게 생산된 에너지를 바탕으로 세포는 스스로의 고유한 기능을 유지한다. 뿐만 아니라 수많은 유전자가 빛에 의해 발현돼 생명활동에 필요한 물질을 만들어 낸다. 피부와 눈이 노랗게 되는 신생아 황달은 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의 한 병원에서 햇볕에 노출된 애기의 배 부위가 더 이상 노랗지 않음을 발견한 것이 치료의 시초다. 덴마크 의사 핀센(Niels R. Finsen)은 현대에 선구적으로 광선치료를 도입한 공로로 노벨상을 수상했다.

우리 조상들은 훨씬 이전부터 햇볕이 건강에 유익함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애기가 한 칠이 지나면 이때부터 햇볕을 쬐여 주었다. 이것이 잊힌 것이다. 비타민D는 햇볕을 통해 합성되는 것이 질적인 면에서 최고다. 이렇게 합성된 비타민D는 각종 암을 예방하고 50가지 이상의 건강에 유익한 유전자를 발현시킨다. 2014년 미국 MIT 연구팀은 빛을 이용해 쥐의 잃었던 기억을 되살리는데 성공했고, 마찬가지로 2016년 국내 연구진은 쥐의 실험에서 치매유발물질을 제거하는데 성공했다. 어둠은 병의 원인이다.

인간은 지구의 역사만큼이나 장구한 세월을 빛과 함께 진화해왔다. 인간과 빛의 관계는 우리가 상상하는 이상으로 넓고도 깊다. 가을양광이 선사하는 풍성한 색채와 빛의 입자는 뇌의 회로를 새롭게 배선함으로써 스스로의 치유를 돕는다. 자연광은 우울증환자를 회복시키기도 한다. 겨울이 문턱이다. 한낮의 자외선은 피하라지만 만추의 양광은 예외다. 이틀만 더 남국의 따뜻한 햇볕을 소망했던 릴케의 기도만큼이나 절실한 만추의 양광(陽光)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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