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상일 경북대 교수 추론

“바위그림, 성공기원·속죄의식”

▲ 황상일 경북대 교수가 고 울산만의 해수면과 지형도를 기반으로 7000~3000년 전 선사인의 고래 사냥법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지금의 태화강은 수천년전 고(古) 울산만(蔚山灣)에 속한다. 당시 바닷물은 지금의 울산시내를 지나 울주군 범서읍 ‘선바위’까지 차올랐다.”

“선사인들은 먼바다에서 고울산만으로 들어온 고래가 기다렸다 이를 상류로 몰아 스스로 고립돼 죽게하는 ‘몰이어법’ ‘좌초어법’으로 사냥했다.”

울주 대곡리 반구대 암각화(국보 제285호)은 지금으로부터 대략 7000년 전부터 3000년 전에 걸쳐 제작됐을 가능성이 높다. 바위에 고래그림을 새겼던 선사인은 도대체 어떤 방법으로 고래를 사냥했을까?

23일 울산박물관에서 열린 대곡천암각화 국제학술대회에서 황상일 경북대 지리학과 교수는 전공인 지리학의 관점에서 당시(홀로세) 울산지역의 해안환경 변화를 기반으로 울산지역 선사인의 고래잡이에 대해 명쾌한 추론을 들려줬다.

황 교수의 이론에 따르면, 선사인은 지금처럼 먼바다에서 고래를 잡은 것이 아니라 당시로는 바다였을 지금의 울주군 굴화리나 성남동 어귀에서 고래를 사냥했다. 고래들은 얕은 바다에서 자라는 풍부한 해초를 먹기위해, 혹은 육식성 고래를 피해 잠시 쉬어가기위해 종종 거친 바다에서 좁고 긴 내만으로 스스로 들어왔다.

선사인의 주거지는 지금의 사연리 인근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고래를 포획한 사람들은 잡은 고래를 배로 운반했다. 그러면서 계곡주변 바위에 그림을 그렸다. 아마도 어로 또는 사냥에 있어 성공을 기원했거나 자신들이 잡은 동물에 대한 영혼을 위해 속죄와 재생을 바라는 의식이었다.

이날 황 교수는 선사인의 고래사냥법에 이어 반구대 암각화 속 고래그림이 제작 초기에 비해 후기로 갈수록 줄어드는 현상에 대해서도 설명했다. 그는 이 또한 울산의 해안환경 변화에서 근거를 찾았다. 암각화 제작이 끝난 시기는 해안선이 태화강 하류쪽으로 옮겨져 반구대 인근에 살던 공동체 주거지와 고래잡이 어장 간의 거리가 크게 벌어졌다.

퇴적물때문에 수심마저 너무 얕아지자 고래가 들어오는 횟수도 극감했을 터이고, 이에 따라 선사인의 생활방식도 주변의 육지동물 사냥으로 서서히 변해갔다. 반구대암각화 제작초기 전체그림의 73.7%를 차지하던 고래그림(바다동물 포함)은 후기로 가면서 16.2%로 떨어졌다. 빈 자리는 돼지와 사슴, 호랑이와 같은 육지동물로 채워졌다.

황 교수의 추론은 이날 심포지엄에서 처음 발표된 건 아니다. 하지만 암각화의 제작시기, 선사인의 고래잡이 방식, 홀로세 환경변화와 생업변화의 과정 등이 상당히 구체적으로 설명되고 있어 참석자들로부터 큰 관심을 받았다. 부족한 신석기~청동기의 유물로는 설명될 수 없지만, 자연과학적 자료를 기반으로 암각화의 시대상과 당시 선사인의 삶을 유추했기에 가능한 일이다.

황상일 교수는 “인간이 자연환경을 변화시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던 당시는 자연환경이 그들 삶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며 “다만, 고고학적, 인류학전 분야의 연구들이 더 축적돼 다함께 상세한 논의가 뒤따라야 한다”고 말했다. 홍영진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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