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이경연, 기박산성 의병장

▲ <선무원종공신녹권>. 왼쪽 넷째줄에서 판관 이경연(判官 李景淵)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기박산성 울산 의병장의 한사람으로
군량미 비축·각종 화살재료 준비 등
정유재란 1년전부터 호국 계책 마련
운량호군 직책으로 왜군과 사투벌여
그의 소모문·축문 실은 ‘제월당실기’
2015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 지정

정유재란이 일어났다. 1592년 4월부터 조선 강토를 유린했던 일본군이 1597년 8월에 다시 침공한 것이다. 이로부터 약 3개월이 지난 11월28일 <선조실록>에는 경상좌도 절도사 성윤문이 임금께 아뢴 전황보고가 기록돼 있다.

경상좌도 성윤문(成允文)이 치계하기를, 신의 군관 훈련원 판관 이경연의 고목(告目)에 “11월2일 서낭당에 주둔하고 있던 무수한 적이 나올 적에 길가에 매복하였다가 일시에 돌격하여 화살을 빗발처럼 날리니 적의 선봉은 이미 죽었고, 우리 군사는 승세를 타서 머리 24급을 베었습니다”라 하였습니다.

이경연(李景淵)은 1592년 4월23일 기박산성에서 창의한 울산 의병장의 한 사람이다. 글 읽던 선비 이경연은 어떤 운명으로 이렇게 화살이 빗발처럼 날리는 전장에 나서게 되었을까. 의병들은 어떤 힘으로 길가에 매복했다가 왜적을 쳐서 그들의 머리 24급을 베게 되었을까.

▲ <선조실록>의 1597년 11월28일 네번째 기사. 왼쪽 첫줄과 오른쪽 첫줄에서 훈련판관 이경연(訓鍊判官 李景淵)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때는 이경연이 27세 되던 1591년 3월3일 정오로 거슬러 올라간다. 울산 선비 18인과 밀양·양산·청도 선비 4인이 무룡산에 올랐다. 이들은 서로 술을 권하며 시를 화답하던 중 뜻을 모았다.

“요사이 남방 소문이 흉흉한데, 만일 전쟁이 난다면 우리는 나라에 생명을 바치자”고 맹서했다. (이경연의 문집 <제월당실기> 중에서)

이경연은 전쟁에 대비해 가문과 나라를 지킬 계책을 세우기로 뜻을 세웠다. 곡식 400여석과 철 2000근을 마련하는 한편, 화살 재료로 뽕나무와 대나무 수만 편을 거두어들이고 산상에 돌멩이를 쌓았다. 그리고 매일 집안 종들을 파견하여 이를 지키게 했다.

1592년 4월13일, 20만 왜적이 상륙하여 다대포, 부산포, 동래포를 연이어 함락시켰다. ‘용사일록’은 <제월당실기>에 수록된 이경연의 난중일기이다. 그 기록을 보자.

▲ ‘용사일록’은 이경연이 쓴 임란 난중일기. ‘용사일록’이 실린 <제월당실기>는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4월15일 왜적이 울산의 연포, 장포, 서생, 방어진 근처에 정박하여 사방을 돌아다니며 마을을 노략질하고 사람을 죽이니 조총의 소리는 천지를 진동하고 연기와 안개는 사방을 덮어 지척을 분간하기 어려웠다.

▲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경연은 신주와 위패를 선영의 분묘 아래에 묻었다. 그리고 식솔을 더 깊은 산골인 강동의 달골로 피난시켰다. 동네 사람들이 이경연의 집으로 몰려와서 “나리, 나리, 우리를 살려주시오”라 부르짖으며 대책을 물었다. 이경연은 “내가 말하는 대로 따르고 두려워하지 않으면 모두 살게 된다”고 말하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집안의 노복들을 징발하고 인근의 장정들을 규합하니 40여명이 모였다. 각자 죽창을 들고 돌멩이를 모으라 하여 이들과 함께 동대산에 올라 적정을 관찰했다.

4월19일, 이경연은 집안 식구들에게 “내가 지금 출진하여 전장에서 죽으면 죽겠으되, 살아서 돌아오면 다시 보자”라는 말로 이별을 고한 뒤 군사를 인솔하여 기박산성으로 들어갔다.

4월23일, 의병장들이 모여 기박산성에 제단을 설치하고, 소를 잡고 술을 마련하여 의병의 출진을 하늘에 고유했다. 기박산성 울산의병의 시작이었다.

5월2일, 이경연은 의병을 모집하기 위해 소모문(召募文)을 지어 향내에 고지했다. 또한 축문을 지어 함월산에서 기도를 드렸다. 그 축문은 <제월당실기>에 수록되어 있으며, 내용을 간추리면 다음과 같다.

만력 20년 임진 5월 초2일에 창의사(倡義士) 이경연은 감히 살펴 함월산 밝은 신령 앞에 고하여 말하기를 엎드려서 우뚝한 저 동산에서 함월산이 특이하도다. 함월산의 베품이 두루 흡족하고 그 신령께서는 참으로 밝으시도다. 엎드려 기도하오니 곧 응답하여 우리 남국을 가호하소서.

5월15일, 신흥사의 중 지운(智雲)이 승병 100여명을 인솔하여 군량미를 운반해 왔다. 그는 성문 밖에 서서 이경연에게 군례(軍禮)를 행하며 청하기를 “절에 보관해 둔 쌀 300석을 가져왔으니 군량미로 받아주시기 바라오며 또한 평소 소승을 따르던 스님 100여명을 인솔해 왔으니 승군으로 편입해 주기 바라오”라고 했다. 당시 의병진에서 이경연은 군량미 등을 담당하는 운량호군(運糧護軍)의 직책을 맡고 있었다.

신흥사는 기박산성에서 약 2㎞ 떨어져 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신흥사의 현판에는 ‘함월산 신흥사’로 적혀 있었다. 호국사찰 신흥사는 신라시대의 고찰로서 673년에 창건되었고 왜란 중에 불에 타 1626년에 중창되었다.

5월22일, 경상우도 초유사(招諭使) 김성일의 초유문(招諭文)이 도착했다. 이튿날 이경연은 5월2일에 이어 두 번째로 소모문(召募文)을 지어 향내에 공지했다. 이때의 소모문은 <제월당실기>에 수록돼 있으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건국 이래 200년간 국가가 태평하던 끝에 보잘것없는 섬나라 오랑캐가 감히 불측한 마음을 내어 바다를 건너 병기를 휘두르며 우리 강토를 짓밟고 우리 생민을 살육하여 서울을 침범하였으나… 우리 동국(東國)에 머리를 들고 간직한 자로서 임금의 백성 아닌 자가 없다… 대대로 벼슬하여 녹을 받은 신하는 새가 도망치고 쥐가 숨듯이 다만 자기 몸만 알고 나라를 돌보지 아니하니… 우리는 이리저리 흩어져 구차한 삶을 도모하기보다는 차라리 모여서 함께 죽으리라.

임진왜란이 일어난 1592년 4월부터 정유재란이 끝난 1598년 12월까지 이경연은 다른 의병장들과 함께 울산지역에서 왜적의 후미를 교란했다. 또한 대구, 문경, 창녕까지 달려가 의병 혹은 관군과 합세해 왜적을 무찔렀다. 힘없는 조정에 대한 안타까움과 도망치기에 바쁜 벼슬아치에 대한 실망을 다스려가며 왜적에 대한 분노로 무장하여 전장을 누볐다.

이름 없는 한 울산 선비의 7년 사투를 오늘의 우리 국민이 잘 기억하지 못한다. 기록이 모자라기 때문이다. 왕조실록은 궁중과 조정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라 민초의 일에 관심을 가질 수가 없었다. <선조실록>에 초두와 같이 성윤문의 전황보고의 일부로 이경연의 일이 기록된 것은 거의 우연이며 기적에 가까운 일이다. 이 기록으로 울산의병과 이경연이 가슴 졸이고 피 흘리던 그날의 일이 관찬사료로 오늘날까지 전해짐은 울산으로서도 다행인 일이다.

이경연의 문집인 <제월당실기>가 전해져 온 것 역시 참으로 고마운 일이다. <제월당실기>가 없었다면 울산의병의 초기 역사가 저렇게 상세하게 그려질 수 없었을 것이다. 4세기 전 울산사람의 마음을 모아 간절하게 신령의 가호를 빌던 축문, 그리고 백성의 마음을 울리고 의병의 피를 끓게 했던 소모문의 속살을 우리가 대할 수 없었을 것이다. <제월당실기>는 한국국학진흥원 소장 ‘한국의 유교 책판’의 일부로 2015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지정됐다.

이경연은 1565년에 지금의 북구 무룡동 주렴마을의 탕근산 기슭에서 태어났다. 공의 관향은 학성이며 호는 제월당이다. 퇴계의 제자인 조호익(曺好益) 선생의 문하에서 수학하고 1594년에 무과 별시에 급제했다. 선무원종공신으로 공신녹권을 받았다. 이경연의 벼슬은 임란 당시 종5품 판관이었으며 그 후 종3품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에 이르렀다. 1643년에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고, 북구 화봉동의 동화산 자락에 그 유택이 있다. 이명훈 고려대 명예교수 조선통신사현창회 수석부회장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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