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입동이 내일모레 겨울의 문턱이다. 너울너울 봉화(烽火)처럼 피어올라 가을의 서막을 알리던 고개 숙인 억새들도 이젠 홀가분히 고개를 들었다. 치열하게 대지의 수분을 뽑아 올리던 거리의 가로수 튼실한 물관부도 서서히 작동을 멈추는 듯 무더기로 우수수 잎들이 진다. 찬란했던 가을이 진다. 냉기 품은 바람이 사정없이 지난다. 애틋한 추억을 뒤로하고 달랑 손을 흔들며 떠나는 저 여린 일엽들, 찬란히 빛났던 가을과의 이별이다. 아 ‘저녁노을처럼 하염없이 사라진 애틋한 꿈이여 아름다운 첫사랑’(박목월 시 ‘첫 사랑의 꿈’). 적막산천 홀로 남은 억새가 달빛아래 서걱서걱 슬피도 운다. 누가 만추의 서정을 고독이라 했는가. 만추의 서정은 고독이 아니다. 측은지심(惻隱之心), 여린 가슴 저미는 알싸한 아픔이다.

수필가로 널리 알려진 금아 피천득 선생은 ‘여린 마음’으로 돌아간다면 인생은 좀 더 행복 할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아픔의 역설이다. 여린 마음이란 여린 품성이 발현된 것이다. 인체의 면역계도 여린 마음을 지니고 있다. 이를 ‘면역관용’(immune tolerance)이라고 한다. 면역계가 여린 품성을 상실하여 일으킨 질환이 자가 면역질환이다.

최근 면역세포의 여린 품성을 이용한 치료법이 소개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고 있다. 기존 면역치료법은 환자의 혈액에서 면역세포를 추출하고 실험실에서 유전적인 변형을 거쳐 수정된 면역세포가 다시 환자에게 주입되어 암, 백혈병 등 악성세포를 공격하는 치료법이 있었으나 이 치료법은 정상세포도 공격을 당할 수 있는 제한점이 있었다. 인위적인 면역강화가 면역계의 여린 품성을 앗아갔기 때문이다. 여린 품성을 상실한 개체는 스스로 병든다. 스스로를 보호하는 힘, 그것은 바로 여린 품성에서 발현된 ‘여린 마음(惻隱之心)’이다.

여린 마음은 스스로를 지키는 힘이기도 하지만 인간의 존엄과 가치를 보호하는 최고경지의 진화적 산물이다. 여린 마음은 타고난 것(personality)이지만 대부분 후천적으로 습득된다. 그러므로 자주 발휘되지 않으면 상실된다. 만추의 서정은 여린 마음(惻隱之心)을 일깨우는 가을이 주는 또 하나의 선물이다. 김문찬 울산대학교 의과대학 교수·가정의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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